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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9-2.jpg

 

- 머리말 -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약 십 년에 걸쳐 모은 것이다. 무엇보다 전례의 세계를 알아듣는 데 보탬이 될까 해서 써본 글들이다. 그러는 동안, 어떤 시대에 어떤 영향을 받고 어떤 관습 또는 기도문이 생겼다는 식의 해설로는 길잡이의 구실을 못하겠다고 느껴졌다. 마찬가지로 그저 이 예절은 무엇을 뜻하며 저 예절은 무엇을 뜻한다는 풀이만 가지고도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아무리 뜻깊은 학술적 풀이라도 전례행위 자체의 실천으로 생명을 얻기 전에는 역시 별수가 없었다. 
  전례에서는 생각보다 현실이 그 핵심을 이룬다. 그것도 지난날의 현실이 아니라 우리에게, 또 우리에 의해 언제나 새로이 실현되는 지금 이 자리의 현실, 형태와 동작으로 구현되는 인간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두고 이것은 어느 시대에 생겨 어떻게어떻게 발전해 온 것이라고 말해본들 그것으로써 체득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교훈적 고찰로 뒷받침했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오히려 전례의 살아 있는 형상에서 그 진수를 알아보도록 돕는 길밖에 없다. 몸을 보고 영혼을 알고, 지상에서 행해지는 것을 보고 영적이고 숨겨진 것을 깨닫도록 돕는 것이 옳은 길이다. 
  전례란 거룩하고 숨겨진 사건이 형태를 갖춤으로써 이룩되는 세계이다. 즉, 성사적이다. 따라서 믿는 인간은 "안 보이는 은혜의 보이는" 거룩한 "표징들"을 깨치고 받아들이고 체현하는 생활한 행위를 우선 익혀야 한다. "전례교육"이라고 하면 - 그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는 하나 - 전례학적 교육을 일차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쉬운 것은 "거룩한 표징"의 생활한 관조의 체현을 돕는 길잡이나 또는 적어도 충동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가장 단순한 길을 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고 효율적이라고 여겨졌다. 즉, 전례의 한층 더 높은 구조를 떠받쳐주는 기초요소부터 시작하여 다루는 것이 옳게 보였다. 우리 마음에서 이런 기초적 표지에 공명하는 데에 우선 호소해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과연 어째서 표지이며 상징인지를 느껴볼 셈이었다. 이런 표지들이 생활한 표현 과정에 의해 이해되어 관습적 형식에서 참 상징으로 되살아난다면, 아울러 자신의 자태를 통해 자기 고유의 내면을 표출하는 터전이다. 그리스도교적 형상의 창조와 관조의 주체인 인간은 영신과 더불어 육신으로도 영세한 자이다. 그런 만큼 이런 모든 형상도 거룩한 표징으로, 성사와 준성사의 요소로 이해되도록 우리는 꾀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처음부터 완벽은 생각지도 않은 짤막한 글발로 토막토막 시도됐던 것이 마침내 당초의 뜻보다 깊은 근거와 정당성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일정한 계제에 일정한 사람들의 생활의 진전과 깊이 연관됐던 것을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난 이제 별도로 펴낸다는 것은 생각해 보면 애매한 일이다. 뿐더러 이런 시도에서 미흡했다고 지적받아야 할 점이 얼마나 많은지는 저자부터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너무나 객관성을 결여하고 도리어 서정적이고 주관적이라든가, 필연성을 띠지 못하고 우연적이고 인상주의적이라든가, 문장으로서 허물잡힐 것은 젖혀놓고라도, 어마든지 있다. 단지 여기 밝혀보려한 기본 사상만은 타당하다. 그리고 석연치 않은 많은 점을 무릅쓰고서라도 펴낼 만하다고 여전히 생각된다. 왜냐하면 비록 그 목표는 다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인식되고 시도되어야 할 것은 적어도 가리키고는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필자의 우견으로는 현재 이런 의도로 쓰인 글이 전례계에 별로 안보인다.
  그러나 누가 이보다 훨씬 더 낫고 옳은 말씀을 해줄 수 있는지는 필자도 잘 안다. 그것은 자신도 전례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아이에게 십자성호를 옳게 긋는 것을 가르치고, 아이의 속마음을 말해주는 표상을 켜놓은 촛불에서도 알아보게 하고, 마음과 몸으로 아버지 집에 사는 법을 가르쳐 주는 그런 어머니일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심미적 입장에서도 아니고, 또 어떤 생각을 동작으로 그저 꾸민 그런 것만으로도 아니고, 그냥 보는 일 하는 일로서 가르쳐 주는 어머니일 것이다. 아니면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들과 정말로 생활을 같이하는 스승일 것이다. 주일을 참 주일로, 즉 축제로 느끼고 지낼 수 있게 아이들을 키우고, 교회생활의 한해, 그 계절, 성당 문과 종, 성당의 공간과 행렬 - 이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온갖 거룩한 표지를 산 체험으로 파악하게 해줌을 깨쳐주는 그런 스승일 것이다. 
  이런 뜻에서 마리아 몬테소리의 글 한편을 보고 많은 위안과 희망을 얻은 적이 있었다. 그는 산 실행을 바탕을 하는 교육을 제창하고 실천함으로써 저명해진 가톨릭 교육가였다. 그의 보고에 이런 교육 이념을 실천하는 한 학교 아이들이 몸소 포도밭을 가꾸어 추수를 하고 밀을 심고 키워 거두어들여서는 교회 규정에 따라 재주껏 빵과 술을 만들어 제물로 제대에 갖다 바쳤다고 하였다. 여기 올바른 지도만 보태면 그것이 바로 전례교육이 아니겠는가.
  전례생활로의 길은 단순히 가르치기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해보아야 아는 일이다. 
  그밖의 것은 보는 일과 하는 일에 맞추어야 한다. 뚜렷한 가르침으로 알 것을 알고, 역사교육을 통해 가톨릭 전통에 근거를 두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전례는 역시 하나의 실행이라야 한다. 무엇을 참말로 "한다"는 것은 익숙하려고 그냥 연습삼아 "해본다"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한다는 것은 인간이 모든 창조력을 다하는 근본적 행위이다. 그것은 하나의 산 체현이라야 하고 산 체험, 산 파악, 산 관조라야 한다. 그러한 교육자들이 자신의 체험에서 거룩한 표징을 말하는 날이 온다면 이 책은 사라져도 좋다. 그때까지는 힘자라는 대로 할말을 할 권리도 있고 의무도 있다 하겠다.
 
슈베비셔 알고이 모오스하우슨에서
1927년 봄
저자(로마노 과르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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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8.08.18 21:53

    전례를 더 깊이 이해하고 더 가깝게 다가가시는 데 도움이 될까해서 조금씩 올리겠습니다. 분도 출판사에서 나온 소책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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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8.08.18 21:54

    글의 순서(주제)는 머리말, 십자성호, 손, 장궤, 기립, 걸음, 가슴치기, 층계, 문, 초, 성수, 불, 재, 향, 빛과 열, 빵과 술, 제대, 제포, 성작, 성반, 축복, 거룩한 공간, 종, 거룩한 시간(아침, 저녁, 낮), 하느님이름 입니다.

  • ?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8.08.18 22:01
    <로마노 과르디니>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이자 작가, 신학자이다. 20세기의 가톨릭 지성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탈리아 출생으로, 독일로 가서 베로나에서 살았다. 본대학에서 수학하고,1923∼1939년 브레슬라우대학과 베를린대학 교수, 1945~1948년 튀빙겐, 1948년 이후뮌헨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가톨릭 청소년운동 및 전례(典禮)운동을 지도했으며, 동시에그리스도교적 실존철학의 입장에서 실존과 신앙문제에 대해 연구를 계속하여 철학 ·문예 ·문명론 분야의 저서가 많다.
    주저에 《전례의 정신:Vom Geist der Liturgie》(1918) 《도스토옙스키》(1932) 《파스칼》(1934) 《소크라테스의 죽음:Der Tod des Sokrates》(1944) 《근대의종말:Das Ende der Neuzeit》(1959) 《Sorge um den Menschen》(2권, 1962∼196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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