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걸을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서두르는 것도 뛰는 것도 아닌 차분한 움직임이 바로 걸음이다. 그렇다고 끄는 것은 결코 아니고 힘차게 나아가는 것이 걸음이다. 걷는 이는 발을 부드럽게 다니면서도 끌지는 않는다. 곧게 서서 가지 굽히고 가지는 않는다. 조금도 불안한 데가 없이 평형을 이루고 나아간다.
올바른 걸음걸이란 고귀한 것이다. 자유로우면서도 규율이 바로잡혀 있다. 가벼우면서도 든든하고 곧으면서 힘을 받고 찬찬하면서 앞으로 밀고 나간다. 그뿐 아니라 사나이 걸음에는 굳셈이, 아낙네 걸음에는 부드러움이 따로 있다. 그것은 밖으로 짐을 져도 그렇고 안으로 평온을 지니고 가도 그렇다.
더욱이 걸음을 경건히 걸을 때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걸음 그것이 조촐한 제사가 될 수 있다. 지존하신 주님의 거처인 성당에서 하느님이 지켜보시는 가운데 마음을 가다듬고 경건하게 하느님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부터가 한 제사가 아니랴. 하거늘 서로 밀꼬 쑥덕거리며 그저 아무엏게나 하는 행렬(격식이나 의례를 갖추어 열을 지어 행진하는 일)을 어찌 하느님을 모시고 가는 거동이라 할 수 있겠는가. 모든 이가 성체 안의 주님을 모시고 시가를 행진하거나 "주님의 소유"인 들로 지나가면서 남자들은 뜸직한 걸음으로, 부인들은 어머니다운 품위로, 처녀들은 밝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청년은 씩씩하고 단정한 걸음으로 다함께 나아갈 수 있다면 그 얼나나 성사를 이루겠는가.
그렇게만 한다면 그것이 보속의 행렬이건 기원의 행렬이건 참다운 기도가 될 수 있겠다. 아니 인간의 죄책과 궁핍을 뼈저리게 체험하면서도 그리스도적 확신에 사는 산 깨달음의 발로일 수도 있다. 마치 인간에게는 다른 모든 힘 위에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지닌 의지라는 힘이 있듯이, 인간의 온갖 궁핍과 죄책 위에는 살아 계신 하느님이라는 힘이 또한 군림한다는 깨달음의 발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걸음이란 인간 본질의 숭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을 지니고 평온하게 바로 서 있는 자세란 오직 인간만의 특전이다. 바로 서서 걷는다는 것은 곧 인간됨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인간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종족"이라고 성서는 말한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에게서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자들이다. 그리스도는 특히 성찬의 성사를 통해 우리 안에 살고 계시다. 그의 몸은 우리 몸 안에 살고 있으며, 그의 피는 우리 피 안에 흐르고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안에 머물리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자라시고 우리도 갈수록 그리스도 안으로 깊이 자라, 마침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하고 완숙한 모습에 이르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온전한 형태를 갖추게 되어", "우리가 밥을 먹든 잠을 자든 그밖에 무엇을 하든" 일과 휴식과 기쁨과 눈물, 이 모두가 하나인 그리스도 생활이 되리라는 것이다.
이런 신비에 대한 깨달음이 올바른 걸음에서 아름답고 생활한 표현을 찾을 수 있다. 그런 뜻의 걸음은 "내 앞에서 걷고 완전해지라"는 말씀을 심오한 표징으로 승화시킨 행위일 수 있다.
다만 그런 걸음의 아름다움은 순박한 진실에서만 있을 수 있다. 그 아름다움은 허영으로 찾아서는 결코 얻지 못할 것이고 오직 진리에서만 솟아나올 것이다.
거룩한 표징 - 로마노 과르디니
좋은아침에 좋은 글 묵상하며 보내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