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표징 - 불

by 김아우구스티노신부 posted Sep 1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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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저녁에 시골길을 가노라면 어둠과 추위에 싸여 마음이 절로 외로워진다. 무언가 산 것을 찾고 싶어도 찾아볼 수 없다. 낙엽진 벌거숭이 나무, 싸늘해 보이는 산등성이, 텅빈 논밭, 어디를 둘러보나 죽은 풍경뿐이다. 그 한가운데 산 것이곤 내 마음밖에 없다. 그러다가 길이 굽으면서 불 켜져 있는 게 저만치 보인다. 이리 보고 무어라 부르는 것 같다. 찾는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한 듯이.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듯이.

 

  마찬가지로 날이 저물어갈 때 침침한 방에 앉아 있다고 하자. 벽도 모두 어스름하고 세간마저 묵묵하다. 그럴 때에 귀에 익은 걸음소리가 들리고 익숙한 손이 화로를 피워 놓는다.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가 화로 안에서 나고 불길이 인다. 화로 아궁이에선 붉은 빛이 따뜻이 비쳐나와 방안을 아늑하게 밝힌다. 아까와는 얼마나 다른 느낌인가. 모든 것이 혼을 얻어 살아난다. 마치 기가 죽었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피어오르듯이.

 

  그렇다. 불이란 생명과 통하는 것이다. 생활한 우리 영혼의 가장 순수한 상징이다. 우리 내심의 가장 산 체험들의 상징이다. 따뜻하고 빛나며 언제나 생동하고 언제나 위로 오른다. 남김없이  위로 솟는 불길은 공기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한결같이 위로 타오르고 빛을 발하면서 주위를 따뜻하게 해준다. 우리 안에서 항상 불타면서 빛이 되어주고, 저열한 힘이 사방에서 억누르려 해도 늘 위를 지향하는 그 무엇과 통한다고 느껴진다. 불은 그 주위를 침투하고 생기를 띠게 하고 승화시킨다. 불이 그 빛을 발할 때마다 곧 모든 것의 중심이 된다. 그것은 이 세상을 밝히고 모든 것에 사무쳐 각각 그 뜻을 부여하기 위해 우리 안에 켜져 있는 저 신비로운 빛의 표징이기도 하다.

 

  그렇다. 불은 우리 내심의 표상으로, 상승하며 빛나는 강한 정신의 표상으로 타오르는 것이다. 불길이 춤추고 빛나는 것을 보면 살아 약동하는 무엇을 지켜보는 느낌이다. 우리도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라도 표시하고 싶으면 불을 켜놓는다. 따라서 우리가 항상 지키고 있어야 할 제대 앞에 불을 켜놓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신비롭고 거룩하신 현존(現存)을 향해 기도하고 깨어 있으면서 우리 안의 모든 정력과 정신과 함을 모아 지켜 서 있어야 할 우리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뵈오면서. 우리는 그곳에 우리 생명의 상징이며 표현인 불을 켜둠으로써 이 뜻을 아뢰는 것이다.

 

  저 감실등에 타오 있는 불이 나 자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 불은 나의 영혼을 의미하며 또 의미해야 옳다. 그저 자연 현상으로서의 불 그 자체가 하느님께 무슨 말씀을 드리겠는가. 하느님을 향해 사는 우리 삶의 표현으로 삼기 전에는. 하느님이 계신 곁이야말로 우리 영혼이 타오르고 하느님을 위해 불과 빛이 되어야 할 곳이다. 거기야말로 우리도 깃들일 곳이다. 그래야 저 감실등에 켜 있는 조용한 불이 참으로 우리 내심의 표현이 된다.

 

  그렇게 되도록 적어도 노력해 보자.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더 가까워지면 빛에 잠긴 고요한 순간을 누리다가도 마음놓고 사람들에게로 되돌아갈 수 있다. 빛이 하느님 계신 곳에 그대로 머물러 주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께 "주님, 저것이 제 영혼이옵니다. 항상 하느님 곁에 머물 것입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한 표징 - 로마노 과르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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