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선물

by 김아우구스티노신부 posted Sep 1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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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우리는 결코 냉대를 받지 않을 것이다. 선택된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영광에 있어서 서로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가장 새로운 말씀 78>

 

 

구약과 신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방인을 자기 집에 맞아들이는 의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줄 뿐 아니라 귀중한 선물을 가져온 손님이 자신을 환영한 주인에게 얼마나 그것을 건네주고 싶어하는지도 말해준다. 사실 주인과 손님 사이의 구별은 인위적인 것을 뿐 새로운 일치 안에서 사라져버린다.”

헨리 나웬, <영성생활의 세 가지 움직임>

 

 

버릴 고세트는 스물세 살에 런던 오페라극장에서 가수로서 첫 공연을 가졌다. 그녀는 뛰어난 실력으로 푸치니의 라보엠에서 여주인공 미미 역을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 음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후 2년 동안 그녀는 베드리의 춘희에서 비올레타 역과 나비부인에서 초초상 역, 그리고 몇몇 다른 오페라의 여주인공에 대한 해석에서 비평가들의 갈채를 받았다. 이처럼 그녀는 당시 장례가 가장 촉망되는 가수로서 일류 오페라단의 총아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없이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한창 아리아를 부르던 도중 목소리가 갈라져 아무리 노력해도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말은 정상적으로 할 수 있었지만 노래는 전혀 부를 수 없었다. 그녀의 가수 생활은 끝난 것이다. 이 이야기가 시작될 무렵 그녀는 음악계를 떠나 근처 대학에서 2년 가까이 현대언어를 가르쳐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새로운 상황에 잘 적응했음에도 그녀는 이전의 생활이 몹시 그리웠다. 그러나 용기를 내 옛날 일을 생각하지 않고 현재 생활에 충실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이쯤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자.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은 피에트로 갈바니다. 그는 이탈리아 성악교사로 출발해 그 분야에서 거의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 가능성 있는 목소리를 뛰어난 목소리로 바꿔놓는 그의 능력 때문이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둔 갈바니는 자기 손으로 오페라를 흥행시켜보려고 새로운 오페라 두어 편을 직접 제작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모험은 재정적인 실패로 끝났고 그 과정에서 그는 전재산을 날렸다. 그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간 그는 음악과 관계된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봤지만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가난해도 피에트로 갈바니는 기운을 잃지 않고 거리에서 발밑에 동냥 그릇을 놓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그것은 평생 그의 취미였다) 기품 있는 거지가 되었다. 그가 박스터 가와 프리드맨 가의 모퉁이에서 연주하며 살던 시절에 이야기는 시작된다. 매우 간단한 이 이야기는 두 사람이 새 인생을 살기까지 서로가 주고받은 선물에 대해 전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몸인 신자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모든 것은 버릴이 성탄절 준비를 위해 물건을 사러 외출한 데서 비롯된다. 태양은 찬란하게 빛나고 공기는 더할 수 없이 상쾌했다. 그녀는 여느 때와는 달리 기분이 무척 좋았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박스터 가와 프리드맨 가의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추위를 무릅쓰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피에트로 갈바니에게 많은 돈을 적선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동냥그릇에 지갑에 든 동전을 몽땅 쏟아 부었다. 동냥그릇에 떨어지는 요란한 동전소리를 들은 갈바니는 바이올린 연주를 중단하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옛 신사가 하듯이 모자를 벗어 들고 감사의 뜻으로 웃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라치에! 몰태 그라치에!”

 

그것은 몇 시간 뒤 바로 그 길모퉁이에서 일어날 사건의 전조였다. 쇼핑을 마친 버릴 고세트는 아파트로 향했다. 그녀의 아파트는 마지막으로 들른 가게에서 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무거운 상자들을 잔뜩 안고 있었으며 몹시 지쳐 있었다. 평소 피에트로 갈바니가 바이올린을 켜던 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녀는 쇼핑꾸러미 하나를 떨어뜨렸다. 마침 물건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던 노음악가가 그것을 보았다. 그는 몇 시간 전 많은 동전을 동냥그릇에 인자하게 떨어뜨려준 젊은 여성을 알아보았고 이미 양팔에 꾸러미들을 잔뜩 안은 그녀가 떨어진 꾸러미를 주울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한때 위풍당당했던 신사는 그녀 옆으로 달려가 꾸러미를 집어 들면서 말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도와드리죠, 아가씨. 이렇게 많은 짐을 들고서는 도저히 집까지 갈 수 없을 겁니다. 제가 몇 개를 들어다 드리겠습니다. 저는 오늘 일이 모두 끝나 시간이 많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버릴 고세트는 생판 모르는 사람을 집까지 데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노인이었고 전혀 악의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택시를 잡을 상황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너무 지쳤고 혼자서 그 많은 짐을 들고는 도저히 아파트까지 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노음악가의 제의를 감사히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그녀의 아파트까지 걸어갔다. 두 사람은 가면서 형식적인 서로의 이름을 밝히고 몇 마디 잡담을 나누는데 상대의 이름을 듣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버릴이 피에트로 갈바니의 이름을 알고 있기에는 너무 젊었고 그녀가 오페라계에서 명성을 날릴 때 쯤 그 유명한 성악교사는 이미 잊혀진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피에트로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얇은 외투만 입고 추위에 떠는 노인을 보면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따뜻한 커피라도 마시고 가라며 집안으로 초대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파트는 비좁았지만 아늑했다. 그런데 그 비좁은 아파트의 대부분을 그랜드 피아노가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그녀가 도저히 단념할 수 없는 과거의 유물이었다. 그녀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작은 탁자에 잔을 놓을 때 피에트로가 물었다.

 

당신은 음악가인가요?”

 

그녀는 당황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니에요, 음악가는 아닙니다 .다만 옛날에 노래를 조금 불었을 뿐입니다. 오페라를요. 하지만 목소리를 잃었어요.”

 

마지막 말은 가능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려 했다. 그러나 피에트로는 그녀가 아직도 그 화제에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덧붙였다.

 

이미 아주 오래된 일인 걸요.”

 

인간의 목소리, 특히 오페라 가수의 목소리에 전문가였던 피에트로 갈바니는 음악교사로서 오랜 경력을 쌓는 동안 그와 유사한 일을 여러 차례 보았다. 대게 그처럼 갑작스런 목소리의 고장은 노래를 지나치게 많이 부르거나 자신의 목소리에 맞지 않은 역학을 노래한 데서 온 결과였다. 아니면 그 두 가지가 합쳐졌을 수도 있다. 그는 버릴의 스승들이 그녀의 목소리를 잘못 사용하도록 가르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럴 때 최고의 치료방법은 한두 해 동안 노래를 부르지 않고 성대가 스스로 회복되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그처럼 오랫동안 쉬고 나면 성대는 이전보다 훨씬 더 좋아지는 법이다. 다만 목소리를 다시 찾은 뒤라도 버릴과 같은 가수는 이전에 목소리를 망친 원인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장기간 실력 있는 스승에게 지도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노음악가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었다. 그때 멋진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 지난날 성악교사였던 내가 이 매력적인 여성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면 어떨까?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정말 행복한 죽음을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노력을 할까? 다시 실패한다면 그녀에게는 커다란 고통이 될 것이다. 아마 모험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겠지... 으음, 어떻게 한담?’

 

피에트로는 말없이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영감을 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녀 역시 너무 지쳤는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노음악가가 떠날 채비를 하며 찻잔을 내려놓는데 불현 듯 영감이 떠올라 말했다.

 

음악가의 한 사람으로서 당신에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나를 위해 노래 한 곡 불러주지 않겠어요? 간단한 노래도 좋습니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저는 노래를 부를 수 없어요! 지금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요. 저는 노래를... 부를 수가 없어요!”

 

피에트로는 참을성 있게 그녀에게 사정했다.

 

그렇다면 고요한 밤이라도 나와 함께 불러봅시다.”

 

피에트로는 일어나 피아노 앞에 앉으면 말했다. 그녀는 다시 거부했지만 피에트로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결국 그의 강경한 태도에 피곤에 지친 그녀는 굴복하고야 말았다.

 

피에트로가 먼저 바리톤으로 노래를 부르자, 그녀는 그를 따라 멜로디를 콧노래로 흥얼거렸다. 그녀는 자기가 콧노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2년 만에 처음이었다! 호기심이 인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지만 과감하게 몇 소절을 따라 불러봤다. 다시 한 번 그녀는 자신이 정상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 그녀를 더욱 대답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좀 더 크게 노래를 불렀다. 한편 노음악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차츰 낮춰갔다. 노래가 끝날 무렵, 그녀는 전성기 때의 목소리만큼은 아니지만 거의 정상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미처 실험을 끝내기도 전에 피에트로가 다른 노래를 했다. 이번 노래를 좀 더 성량 있는 목소리를 요구했지만 피에트로의 노래하는 모습이 너무 즐거워 보여 그녀는 계속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는 더 좋아졌다. 세 번째, 네 번째 노래가 계속되었다. 아무도 피에트로 갈바니를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쯤 되자 그녀도 노래를 중단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회복되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확인할 기회가 곧 찾아왔다. 피에트로가 노래를 오페라의 간단한 아리아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공포가 물밀 듯이 몰려왔지만 그녀는 용감하게 맞섰다. 어쩌면 자신의 목소리가 정말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한번 시험해볼 만하지 않은가? 피에트로 갈바니가 매우 조심스럽게 쉬운 곡에서 조금씩 어려움 곡으로 진행해간 덕분에 한 시간 뒤 버릴 고세트는 난이도가 높은 레퍼토리 중에서도 가장 힘든 세 개의 아리아, 라보엠에서 미미의 이별의 노래’, ‘나비부인에서 어느 개인 날’, 그리고 마지막으로 춘희에서 , 지나간 세월이여를 불렀다. 이제 피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는 목소리를 되찾았을 뿐 아니라 예전보다 훨씬 훌륭하게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지막 아리아를 끝냈을 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녀는 진심에서 우러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갈바니 씨!”

 

피에트로 갈바니는 눈 가득히 장난기를 띠고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가씨. 오늘 오후에 당신이 그 많은 동전을 나에게 준 뒤 내가 한 일이라고는 당신이 다시 노래하게 만든 것뿐인걸요. 우리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필요한 거지였던 셈이죠.”

 

그 다음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버릴 고세트는 시대를 초월해 가장 위대한 오페라가수가 되었고, 피에트로 갈바니는 그 수 약 20년 동안 그녀의 교사이자 친구로 함께 했다.

 

인생을 마칠 때까지 그들은 수없이 서로를 도와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서로에게 필요한 거지사이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서로에 대한 관대함이 그들의 인생을 거룩하게 만들어주었다.

 

내발의 등불 - 닐 기유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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