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표징 - 거룩한 시간 (저녁)

by 김아우구스티노신부 posted Sep 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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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도 신비가 깃들인다. 죽음의 신비가 그것이다. 날이 저물면서 사람은 잠의 침묵으로 들어갈 채비를 한다. 아침 시간은 새로워진 생명의 정기에 차 있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삶이 고달프고 휴식을 찾게 된다. 여기 죽음의 신비가 메아리쳐 온다. 우리는 그 소리를 못 듣는 수가 많다. 아직도 현실생활의 이모저모와 내일을 위한 온갖 소원과 계획으로 마음이 온통 부산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도 어떤 때는 멀리서 나는 소리처럼 어렴풋이 들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저녁에 아무도 더는 어쩔 수 없는어둠으로 삶이 기울어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것은 모두 우리가 죽음의 신비를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죽는다는 것은 한 삶이 끝나감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죽음은 바로 이 삶의 마지막 부름이다. 죽음은 삶의 더할 수 없고 결정적인 행위이다. 한 개인이나 한 겨레의 일생에 일어나는 일은 그냥 그것으로 결판나는 법이 없다. 문제는 언제나 한 사람이나 겨레가 그 일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있다 사건도 어떤 태도로 응하느냐에 따라 이미 일어난 일에서 좋든 나쁘든 무언가 새로운 것을 자아내기 마련이다.

 

 

   가령 어떤 겨레가 크나큰 고통을 겪었다고 하자. 일어난 일은 분명 어차피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직 아니다. 온 겨레가 실망해 버릴 수도 있고 아니면 생각을 돌려 새로 출발할 수도 있다. 그제서야 벌써부터 일어난 일이 마무리된다.

 

 

   죽음도 끝에 가서는 이런 것이 아닐까. , 인간이 자기의 지나간 일생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아닐까. 자기 일생에 결정적으로 지어주는 얼굴이 아닐까. 이 판국에서는 인간이 자기 일생 전부를 다시 한 번 좌우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장엄한 결단이 문제된다. 참회는 그르쳤던 것을 그 불에 달구어 바로잡고, 감사와 겸손은 옳았던 것에 대한 영광을 하느님께로 돌려 모든 것이 하느님께 대한 남김 없는 봉헌이 되게 한다. 그렇지 않고 인간이 낙심하면 자기 일생을 품위도 기운도 없는 종말로 흘려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일생의 끝을 냈다기보다 그저 살다가 말았다고 해야 옳다. 그런 일생에는 아무런 모습도 얼굴도 없다.

 

 

   이것이 바로 숭고한 죽음의 예술이다. 지나간 생애를 하느님을 위해 단 한 마디 소리로 화하는 예술이다. 옳다. 매일 저녁이 참 결말을 삶에 지어주는 숭고한 이 예술의 연습이어야 하겠다. 그 결말은 모든 과거에 종국적 가치와 영원한 얼굴을 부여한다.

 

 

   저녁 시간은 완성의 시간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하느님과 대면하여 궁극적 문책을 받으리라는 것을 예감하면서 하느님 앞에 서본다. 그러고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의 뜻을 느끼며 되씹어 본다. 좋은 일나쁜 일놓친 일버린 일. 과거와 미래의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잃어버린 일마저도 뉘우치는 이에게 되찾아주실 수 있는 분 앞에 우리는 책임을 진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우리가 지낸 하루의 모습을 결정지어 본다. 거기 옳지 않았던 것은 뉘우침으로써 알아차려 고쳐 생각하고, 좋았던 것은 아무런 자만도 없이 겸손히 감사한다. 또 모든 애매하고 모자라고 초라하고 흐렸던 일일랑은 서슴없이 의탁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맡긴다.

 

거룩한 표징 - 로마노 과르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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