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에는 여러 가지 제포(祭布)가 쓰인다. 이른바 성체보(聖體褓)라 하여 성작과 제병 밑에 깔아 주님의 수의 구실을 한다. 사제도 성전을 집행할 때면 장백의(長白衣)를 희게 입는다. 하느님이 자신을 우리 양식으로 주시는 주님 상에는 제대보가 깔린다.
본래 고운 아마로 쓰는 이런 피륙은 매우 귀한 물건이다. 순수하고 곱고 튼튼하다. 새하얗게 깔려 있는 것을 보면 한겨울에 숲을 걷던 생각이 난다. 까만 전나무가 즐비한 가운데 새로 내린 눈으로 티 하나 없이 희게 덮인 언덕에 갑자기 이르렀다. 나는 그 위를 걷자니 거친 신을 신은 발이 내딛기지가 않았다. 그래서 경건한 마음으로 가장자리를 따라 돌아간 적이 있다. 제포도 이처럼 성소에 펼쳐져 있다.
다른 어디보다도 신성한 제물이 봉헌되는 제대 위부터 희게 깔려 있어야 한다. 성소에서도 가장 거룩한 자리로 우뚝 솟아 있는 제대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바 있다. 밖에 보이는 제대가 영혼 안에 있는 제대의 표징이라고 하였다. 아니, 표징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보이는 제대가 헌신의 용의를 말하는 마음의 제대를 뜻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둘이 서로를 부른다. 둘은 신비롭게 하나가 된다. 그리스도의 제헌이 완수되는 참 제대, 온전한 제대는 이 두 가지의 산 일치로 이룩된다.
그래서 제포는 우리 마음에 그토록 와닿는 데가 있다. 무언지 우리 내심에도 제포에 상응하는 게 있어야 할 느낌이다. 그것은 하나의 요청, 하나의 질책 같기도 하고 그리움 같기도 하다. 조촐한 마음에서만 올바른 제사가 바쳐질 수 있고 보면 제포가 보여주는 것은 하느님께 맞갖기 위해 마음이 지녀야 할 순결이 아닌가. 그렇다. 제포가 우리에게 깨우쳐주는 것은 여러 가지다. 진짜 아마포는 결이 곱고 품이 있다. 거칠고 무작스런 것에선 순결이 나올 수 없다. 우락부락한 태도와는 멀고도 멀다. 제포의 힘은 세련에서 오고 그 결은 고귀하다. 그러면서도 힘에 차 있다. 참 아마는 튼튼하다. 거미집처럼 아무 바람에나 나부끼는 나약한 그 무엇은 결코 아니다. 삶을 기피하거나 망상에 빠지거나 헛된 꿈을 꾸지 않는다. 참 순결은 삶의 기쁨으로 생동하고 불굴의 의지로 굳세다.
제포가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묵상거리가 있다. 지금 눈앞에 있듯이 처음부터 그렇게 다듬어지고 깨끗하지는 않았었다는 점이다. 당초에는 거칠고 볼품 없던 것을 자주 빨고 바랜 끝에 비로소 새뜻하고 조촐해진 것이다. 순결이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순결도 하느님 은혜임에 틀림없다. 조촐함을 특은으로 영혼에 받아 지녔기에 내적 순결의 신선을 평생 발휘하는 이들도 물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다. 우리가 통념으로 순결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로 그 뜻이 애매하고, 그저 큰 풍파는 겪지 않았다는 정도이다. 참다운 순결은 시초에 있지 않고 종국에 있다. 꾸준하고 끈질긴 노력 끝에 얻어지는 것이다.
제대에는 새하얗고 곱고 튼튼한 제대보가 깔려 있다. 순결과 내심의 고아와 신선한 생기를 뜻한다.
요한 성인의 묵시록에 “아무도 그 수효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군중이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왔는데 모두 흰 두루마기를 두르고 옥좌 앞에 서 있더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을 보고 한 사람이 묻기를 “흰 두루마기를 두른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또 어디서 왔습니까” 하니,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로서 어린양이 흘리신 피에 두루마기를 씻어 희게 만들었고, 그러므로 하느님 옥좌 앞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고 적혔다. “나를 흰옷으로 입히소서” 하고 성제를 집전할 사제도 장백의를 입으면서 기도드린다.
거룩한 표징 - 로마노 과르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