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표징 - 하느님 이름

by 김아우구스티노신부 posted Oct 0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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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인간은 거칠어졌다. 그윽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없어한다. 말도 그 중의 하나다. 우리 자신이 그 깊이를 더는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말 그것이 외적인 것으로 여기기 일쑤다. 우리가 그 힘을 더는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말 자체가 덧없는 줄 안다. 하기야 말이란 사람을 떠밀지도 때리지도 않는다. 소리만으로 이룩된 연약한 구성체다. 그렇지만 정신적인 무엇을 그릇해 주는 훌륭한 몸이다. 사물의 본성과, 사물에 마주칠 때마다 깨어나는 우리 영혼의 일부가 말에서 서로 만나고 그 표현을 찾는다.

 

아무튼 그래야 할 일이다. 그리고 첫 인간의 경우 분명 그랬었다.

 

성경 첫머리를 보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온갖 짐승을보이시면서 그들의 이름을 짓게 하셨다고 하였다. 이때 인간은 밝은 감관과 영혼의 눈으로 짐승의 외양을 뚫고 그 본성을 알아보고는 본 바를 이름하여 말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영혼은 그 조물에 호응할 수 있었다. 그 조물의 본성과 특수한 어떤 관련을 가지는 그 무엇이 인간의 영혼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또 창조된 만물을 총괄하고 통일하는 것도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밖에 있는 사물의 본성과 그에 응하는 인간의 답 이 두 가지를 하나로 합친 것을 인간은 이름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한몫과 인간 내면의 한몫이 이름에서 하나가 됐던 것이다. 또 인간이 그 이름을 부르면 사물의 골자가 곧 마음에 떠오르고, 그 사물을 보면서 마음 안에 일어났던 반향도 되살아났던 것이다. 이름이란 이렇게 사람이 세상과 자신을 함께 깨달을 수 있는 신비로운 표지였다.

 

낱말들은 모두 이름들이다. 그리고 말을 한다는 것은 사물의 이름들을 다스리는 고도의 예술이다. , 사물의 본질과 영혼의 본질이 하느님 뜻에 따라 함께 이루는 조화 안에서 그 두 가지를 다스리는 길이다.

 

그러나 창조된 세계와 인간 자신과의 이런 밀접한 관계는 계속되지 못했다. 인간이 죄를 짓자 그 유대가 끊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사물은 그에게 낯설어질뿐더러 적이 되었다. 사람도 더는 사물을 맑은 눈으로 들여다보지 않고 탐욕과 지배욕에 물들어 죄인의 불안한 눈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본성마저 이기적 집착 때문에 종잡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예전처럼 이 두 가지를 하나로 파악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젠 아이처럼 순진하게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며 살지를 못했다. 영혼을 어디로 놓친 듯 자신을 옳게 알 수도 다스릴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낱말 이름이 그에게 사물과 인간 본성의 산 결합의 열쇠가 되어주지를 않는다. 또 종전처럼 하느님 뜻대로 평화로 일치된 창조의 의도가 그 이름에 환히 나타나지도 않는다. 찢어진 모습이 거기 비칠 따름이다. 어두운 느낌과 향수가 어린 일그러진 소리가 거기서 들려올 따름이다. 그러다가도 어쩌다 말을 올바로 듣게 되면 벌떡 일어나서 귀를 세우고 생각으로 더듬어보지만 다시는 그 뜻을 되찾을 수가 없다. 모두 뒤섞여 어지럽고 수수께끼 같기만 하여 낙원을 잃었음을 다시금 통감하게 된다.

 

그러나 이젠 그것마저도 없다. 우리들 인간은 어찌나 표피적이 되어버렸는지 다 깨어져버린 말에서 오는 아픔마저도 간직하지를 못한다. 우리는 갈수록 말을 빨리하고 갈수록 건성으로 겉으로만 하면서 속뜻은 생각지 않는다. 마치 동전이 뭇사람 손을 거쳐 굴러다닌 나머지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아 볼 수 없고 그거 몇 푼어치인지밖에 모르게 되는 것과 같다. 그처럼 이름도 이 입에서 저 입으로 쉴새 없이 굴러다니게 되었다. 그 속뜻이 말을 안 하게 된지는 이미 오래고 사물의 본성을 드러내지 않은 지도 오래다. 영혼도 말 안에서 자신을 알아차린 지 오래다. 그리하여 이를테면 그저 말 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젠 사물을 가리키기만 했지 뜻하지는 않는다. 그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남이 알게만 하면 되게끔 되어버렸다.

 

하여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언어가 더는 사물의 본질과 통하고 영혼과 사물이 만나는 길이 되어주지 못하게 되었다.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향수마저도 없어져 동전을 헤아리는 기계처럼 말 돈을 요란하게 요리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가끔 한번씩 놀라기는 한다. 그렇게 되어버린 말에서도 갑자기 무언가가 원천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처럼 우리를 부르는 수가 있다. 사물의 얼이 우리를 부르는 소리다. 때로는 종이에 씌어진 낱말을 보고 있노라면 까만 글자에서 무엇이 반짝하는 수도 있다. “이름이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다. 거기 비친 것은 사물의 본질이고 우리 영혼의 응답이다. 그럴 때문 당초에 말이 태어나고 영혼이 사물의 본체를 만나던 저 원초적 체험을 다시 맛본다. 새로운 조물을 놀라 바라보면서 자신 안에서 우러나오는 힘으로 이름을 지어 그것을 정신으로 파악하던 체험을 우리는 다시금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넓이와 깊이를 되찾을 때면 말은 다시금 하느님이 사람에게 시키셨던 첫 작품이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은 바로 또 타락하고 말고 돈 세는 기계는 다시 요란하게 돌아간다. ...

 

혹시 하느님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나타난 적이 내게도 있었던가. 이런 생각을 곰곰이 하다 보면 구약의 신도들이 하느님 이름을 도무지 부르지조차 않았던 뜻이 이해가 간다. 그들은 대신 주님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것은 유대족의 특별한 간선을 담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하느님의 현실과 임재(臨在)를 직접적으로 느끼고 하느님의 크고 높으심과 두려우심을 그들은 두드러지게 느끼며 살았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당신 이름을 밝히셨다. “있는 자, 이것이 내 이름이니라”(나로다, 내가 그로다). 다른 어떤 존재도 필요치 않은, 스스로 있으면서 모든 존재와 모든 힘을 총괄하는 존재자라고 하셨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느님 이름이 그분의 본성의 표징이었다. 하느님 이름에서 그의 본성이 밝혀짐을 그들은 보았던 것이다. 이름 그것이 그들에게는 하느님 자신 같았다. 하여 일찍이 시나이 산에서 주님 자신을 두렸듯 그의 이름도 두려 숭앙하였다. 하느님도 당신 이름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당신 자신에 대한 말씀처럼 하지 않으시던가. 성전을 가리켜 내 이름이 거기 머물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묵시록에 보면 끝까지 충실한 이들을 하느님 성전의 기둥 삼겠다고 하시고 당신 이름을 거기 새겨놓겠노라고 언약하신다. 그 성전을 몸소 축성하시고 당신 자신을 그 성전에 주기겠다고 하신다.

 

그러고 보면 너의 하느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라는 계명의 뜻을 알아들을 것 같다. 주님이 왜 우리에게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는지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왜 어떤 일을 하든 하느님 이름으로시작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하느님 이름은 참으로 신비롭다. 무한자의 본성이 거기에 밝혀진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존재의 풍만과 그지없는 위엄에 싸여 있는 자의 본성이다.

 

하느님이라는 이름 말마디 안에 우리 영혼의 핵심도 자리한다. 우리 영혼은 필연적으로 하느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 본성은 그 골수에 사무치기까지 하느님께 응한다. 하느님에 의해, 또 하느님을 향해 창조된 인간 본성은 하느님과 결합되기까지는 쉴 줄을 모른다. 우리 자아는 사랑의 공통에서 하느님과 결합되는 것밖에는 다른 아무 의의를 못 가진다. 우리의 모든 존엄, 우리 영혼의 영혼이 하느님”, 그리고 나의 하느님이라는 말마디에 담겨 있다. 나의 근원과 나의 목적, 내 존재의 시작과 끝, 숭배와 향수와 참회, 이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다.

 

하느님 이름은 전부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을 결코 헛되이 부르지 말고” “거룩히 빛내도록 우리를 가르쳐 주십사고 빌어야겠다. 당신 이름이 우리에게 영광으로 빛나도록, 다시는 이 손에서 저 손으로 굴러다니는 죽은 동전이 되지 않도록 빌어야겠다. 하느님 이름은 우리에게 그지없이 숭고한 현실, 거룩하고 거룩하고 또 거룩한 현실로 머물러야겠다.

 

우리는 하느님 이름을 받들기를 하느님 자신을 받들 듯 하기로 하자. 그래야 하느님을 공경하면서 우리 영혼의 성전도 아울러 존중하게 된다.

 

거룩한 표징 - 로마노 과르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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