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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심받은 이들의 부르짖음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저를 바라보던 이의 눈은 저를 보지 못하고 당신의 눈이 저를 찾는다 하여도 저는 이미 없을 것입니다. 구름이 사라져 가 버리듯 저승으로 내려간 이는 올라오지 못합니다. 다시는 제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가 있던 자리도 그를 다시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몸은 입을 다물지 않겠습니다. 제 영의 곤경 속에서 토로하고 제 영혼의 쓰라림 속에서 탄식하겠습니다. 제가 바다입니까? 제가 용입니까? 당신께서 저에게 파수꾼을 세우시다니. ‘잠자리나마 나를 위로하고 침상이나마 내 탄식을 덜어주겠지.’ 생각하지만 당신께서는 꿈으로 저를 공포에 떨게 하시고 환시로 저를 소스라치게 하십니다. 제 영혼은 이런 고통보다는 숨이 막혀 버리기를, 차라리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저는 싫습니다. 제가 영원히 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제가 살날은 한낱 입김일 뿐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는 그를 대단히 여기시고 그에게 마음을 기울이십니까? 아침마다 그를 살피시고 순간마다 그를 시험하십니까? 언제면 제게서 눈을 돌리시렵니까? 침이라도 삼키게 저를 놓아주시렵니까? 사람을 감시하시는 분이시여 제가 잘못했다 하여도 당신께 무슨 해를 끼칠 수 있습니까? 어찌하여 저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께 짐이 되었습니까? 어찌하여 저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저의 죄악을 그냥 넘겨 버리지 않으십니까? 제가 이제 먼지 위에 누우면 당신께서 찾으셔도 저는 이미 없을 것입니다.(7,7-21)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42,2-6)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원하지 않지만, 삶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고통은 그 반대 개념인 즐거움처럼 우리 인생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을 고대의 다양한 문화권에서 폭넓게 발견할 수 있다. 성경에서도 고통이라는 주제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창세기 저자는 3장에서 남자가 양식을 먹기 위하여 흘리는 얼굴의 땀, 여자가 자식을 낳을 때 겪는 괴로움이 인류의 첫 조상이 저지른 죄악 때문이라고 밝힌다. 고통의 원인이 인간의 잘못에 있다는 생각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온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필수 개념인 상선벌악의 원리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선에는 반드시 보상이 주어지고 악에는 반드시 징벌이 주어진다는 상선벌악은 지혜 문학의 바탕이 되는 원리로서 고대 사회의 정의 개념을 대변한다. 이 원리는 인과 법칙이라는 자연 질서와 삶의 체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 상선벌악의 원리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때는 자연과 인간을 올바로 다스릴 책임이 있는 초월자가 개입해야 한다. 세상은 이 상선벌악의 원리가 반드시 지켜져야만 안정을 누리 수 있기 때문이다.

 

 

   욥기에서도 상선벌악의 원리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욥은 소유물을 상실하고 신체적으로 고통받아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닥친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크게 고뇌한다. 욥기의 저자는 머리말에서 욥이 도덕 종교적으로 완전한 인간임을 강조한다. 그런 그가 어찌하여 악의 결과인 온갖 불행을 겪어야 하는가? 상선벌악의 원리를 지켜 주셔야 할 하느님은 왜 이럴 때 개입하지 않으시는가? 이것이 바로 상선벌악의 원리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욥기의 저자가 던지는 질문이다.

 

 

   욥기는 산문(1-2; 42,7-17)과 운문(3,1-42,6)으로 나뉘는데, 욥과 친구들의 태도가 산문과 운문에서 서로 완전히 다르다. 산문에서 욥은 신앙인의 완벽한 모범이다. 천상에서 하느님과 사탄 사이에 벌어진 내기 탓에 지상의 욥은 영문도 모르고 엄청난 시련을 당하지만, 그는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는 불경을 저지르지 않는다. 사탄이 하느님의 동의 아래 그의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빼앗자, 욥은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은 다음, 땅에 엎드려 주님께 아뢰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1,21) 첫 번째 내기에서 진 사탄은 욥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 말고 욥을 직접 치면 그가 틀림없이 하느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느님께 욥의 목숨만은 건드리지 않고 욥을 칠 수 있는 허락을 받은 사탄은 고약한 부스럼으로 욥을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쳤다. 욥은 잿더미 속에 앉아 깨진 질그릇 조각으로 온몸을 긁어 있었다. 그의 아내가 다가와서 차라리 하느님을 저주하고 그 벌로 죽는 편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욥은 이렇게 대꾸하며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짓지 않았다. “당신은 미련한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2,10) 욥의 세 친구가 욥이 끔찍한 불행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하러 욥에게 찾아갔다. 욥은 세 친구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변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목 놓아 울며, 저마다 겉옷을 찢고 먼지를 위로 날려 머리에 뿌렸다. 그들은 이레 동안 밤낮으로 그와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의 고통이 너무도 큰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2,12-13) 극도의 고통과 시련을 겪는 이들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방법은 말없이 그들 곁에서 함께 지내는 것이다.

 

 

   그런데 욥과 친구들의 태도는 운문에서 완전히 변한다. 욥은 자신에게 갑자기 닥친 시련을 조용히 감수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께 원망하고 반항한다. 그러자 친구들은 욥에게 시련을 하느님의 징벌로 받아들이고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참회하라고 윽박지른다. 운문으로 된 담론에서 욥의 친구들이 유일한 논쟁의 무기로 삼는 것은 상선벌악의 원리다. 욥에게 닥친 극심한 고통과 재난은 그가 저지른 죄가 그만큼 무겁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욥이 자기 잘못을 깨우치고 회개할 수 있도록 온갖 충고와 설득을 쏟아 놓는다. 욥 역시 이 원리에 집착하지만, 친구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는 자신이 이런 불행을 자초할 만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을 원망한다. 하느님은 천지 창조 때부터 인과 법칙과 성선벌악의 원리를 피조물 안에 세워 놓으셨다. 이 원리가 깨질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는 그분이 직접 개입하셔야 하는데, 욥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따라서 욥은 하느님이 지금 바로 개입하시어 뒤틀린 사정을 올바로 잡아 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한다. 욥의 관심사는 보상으로 주어질 부귀영화가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욥이 정의의 법정을 열아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사후의 상벌 개념이 없었으므로, 정의가 이 세상에서 인정과 보상을 받지 못하면 그 상황을 되돌릴 기회가 다시는 주어질 수 없었다(19,23-27). 욥은 자신의 억울한 사정이 망각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19,23-24) 단단한 바위에 철필로 쓰고 납을 부어 굳힌 글자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게 남을 것이다. 욥은 자신의 구원자(히브리어로 고엘’)이신 하느님을 기어코 만나겠다고 단단히 벼른다. 뒤틀린 사정의 전말을 알아보고 구원자의 구실을 왜 제대로 안 하시는지 따져 묻기 위해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내리는구나.”(19,25-27)

 

 

 

욥의 기도 2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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