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들

by 김아우구스티노신부 posted Apr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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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누구인가(양장본 HardCover)

 

 

p121-125

 

우리는 수난사기에서 한 임금을 만났다. 헤로데 안티파스 왕이다. 그는 갈릴래아 이투레아의 사분영주(四分領主, 고대 그리스의 한 통치 분할 제도)로서 예수의 군주였으며, 세례자 요한을 죽인 자였다. 그는 사실 사분영주였지만 백성은 그를 왕이라고 불렀다.

 

그의 아버지는 헤로데 대왕인데 실제로 왕의 칭호를 받았었으며, 베들레헴의 갓난아이들을 죽인 자였다. 그는 오늘의 요르단에서 태어난 이교도 출신으로 하스모니아 왕가의 마지막 공주와 결혼했다. 이미 아홉 아내를 거느리고 있던 그로서 이 혼인의 목적은 새 아내보다 출세에 있었다. 왜냐하면 이 결혼으로 유다인들의 땅인 팔레스티나 적역의 왕좌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업과 정치에 능했고 토목과 성전 건립에도 뛰어났다. 그러나 그는 한평생 왕좌를 잃을까봐 늘 초조해하며 지냈다. 그래서 외척들 전부와 몇몇 아들들도 죽이고 마침내 아내인 마리안나까지도 죽여 버렸다. 그는 요셉 플라비우스가 묘사했듯이 글자 그대로 피해망상증에 시달렸으며, 이는 갓 난 젖먹이들을 살해한 베들레헴 사건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같은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그였다. 이미 죽을병을 앓고 있을 때도 아들 하나를 왕궁 수영장에 빠져 죽게 하였다. 죽기 직전에는 예리코 경기장에 400명의 유다인 저명인사들을 몰아넣고 활로 쏘아 죽이게 하여 자기가 죽고 나면 그에 걸맞는 통곡 소리가 나게 하였다.

 

그런데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는 살아남는다. 그는 볼모로 로마에 머물면서 그곳 명문자제들과 로마의 상류사회와 어울리면서 지낸 덕분이었다. 부왕 헤로데는 자기가 사랑하는 안티파스를 고향으로 돌아오도록 꾀어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들은 눈치를 채고 그 꼬임에 넘어가지 않았다.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 걱정돼서였다. 부자 간의 이 만남은 아퀼레아에서 이루어졌다.

 

수난사기에 보면 예수가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연행되어 간다. 그가 축제를 맞아 마침 예루살렘에 있는 왕궁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와는 적대 관계에 있는 빌라도가 예수를 그에게 넘겼던 것이다. 헤로데는 갈릴래아의 군주로서 빌라도에 대립하여 언제나 갈릴래아 사람들 편을 들곤 하였다. 이번 파스카 축제 직전에 본시오는 반란을 진압하면서 갈릴래아 사람 한 무리를 사형에 처한 바 있었다. 이에 헤로데 안티파스는 격분하여 이 사람들은 자기 권한 아래에 있다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본시오는 그러지 않아도 풀어 주려던 예수를 헤로데에게 넘겨 보내면서 여기 갈릴래아인이 한 사람 있소댁의 소관 아니오한 꼴이다.

 

헤로데는 물론 본시오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면서도 정중히 고마움을 표하지만 그 얽히고설킨 사안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성서에는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냈던 헤로데와 본시오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들은 물론 세 겹으로 된 따옴표 안에서 친구인 것이다.

 

예수는 요한의 살해자에게 말을 아끼지 않았다. 전에도 그에 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루카 13,32) 그건 말을 곱게 돌린 것이다. 오히려 송장이나 뜯어 먹는 자칼이라고 했어야 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후일 그의 야심 찬 아내, 멋지게 춤추던 딸년의 어미 헤로디아가 어찌나 여왕이 되고 싶어 하며 그를 졸라 대던지 결국 로마에 청을 올렸다. 그러나 황제는 진노하여 그를 즉각 갈릴래아로 유배하였다. 황제가 헤로디아는 보아주려고 하였으나 그녀는 말하기를 내가 그와 함께 행복도 나누었으니 불행도 함께 나누어야지요하였다. 이렇게 그녀 자신의 좀 나은 측면을 보였다고나 할까.

 

헤로데 안티파스는 리옹에서 한 무명씨無名氏 정치인으로 세상을 떴다.

 

 

-라인홀트 슈테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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