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만나는 길(43)

by 이진기(토마스) posted May 2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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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기 전에 먼저 용서해 주다

 

예수님께서는 깨끗한 마음으로 아버지께 나아가길 요구하신다. 기도는 우리에게 쏟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마음이 올바른 사랑의 상태에 있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지 못하신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기 전에 해야 할 중요한 규범을 말씀해 주셨다. 그리스도의 분명한 이 가르침에 대한 성서 본문들을 인용하겠다.

 

“너희가 일어서서 기도할 때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생각나거든 그를 용서하여라.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마르 11, 25)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마태 5, 23)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기도의 서막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신다. 기도하기 전에 애덕의 옷을 입으라고 하시는 것과도 같다. 그렇다. 우리가 사랑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면 하느님이 주신 옷을 잃어버린 것과도 같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크리스챤의 표시요, 예복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누더기 옷처럼 다 낡아버린 사랑으로는 하느님께 나아갈 엄두도 내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교훈 하셨다. 애덕은 어김없이 지켜지는 아주 중요한 궁중의 예법과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지켜야 할 예법인 애덕은 궁중예법과는 달리 우리 자신을 교만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에서 벗어나게 하며, 실제적인 면으로 나아가게 하고, 귀족들만이 따로 선택되는 것과는 달리 형제들을 향하여 가게하고, 또 형제들을 하느님보다 먼저 첫째로 생각하라고 하며,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형제들이 중요하고 귀중

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어떤 이와 등진 일이 있으면 용서하여 주라.”

용서해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시는 것과 같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렇듯 자연스럽게 이것을 명시하며, 우리가 즉시 알아채야 할 쉬운 것처럼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았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잊어버리고 이것을 넘어서서 용서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반성과 침착함, 열성, 착하고 관대한 마음을 필요로 한다. 흔히 용서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은 우리가 행하는 행위를 잘 분석할 줄 모르는 데에 있고 ‘감정’과 ‘의지’를 혼동해서 생각하는 데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창조하셨기에 ‘마음이 상하는 것’을 느끼지 말라고 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용서해 주려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용서해 주려는 마음은 우리가 조절할 수 있지만 감정은 조절할 수 없다. 용서해 주려는 마음은 항상 가능하지만 상처받은 감정은 모든 이들이 즉시 쉽게 회복시킬 수 없다.

용서했다는 표시가 하나 있는 것 같다. 즉 마음에 상처를 입힌 자에게 선으로 답하고자 할 때이다. 그를 기쁘게 해줄 만한 일이 있으면 뒤로 물러서지 않고 해줄 때이다. 그 사람에 대해 말할 경우 우리들의 말을 지배할 줄 알 때이다. 말없이 그 사람을 위해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줄 때이다.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참으로 용서해 주었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기도에 정진해 나갈 수 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해 주시도록…”

기도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자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아무 도구도 없이 샘물을 길을 수 없듯이 하느님의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그 예물을 그냥 두고…”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해서 똑같은 개념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곧, 기도하기 전에 예복인 사랑을 입으라고 우리에게 명하신다.

미사 시작 때의 통회의 예절과 즉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만남에 앞서 영성체 전에, 형제들과의 평화의 예절을 하도록 하는 교회의 전통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 예절을 연극을 하듯이 하지 말아야 하고 형식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통회의 예절은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죄에서 우리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사랑에 대한 신중한 성찰이란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통회 예절 때 바리사이적인 행위를 할 위험이 너무도 농후하다. 그러므로 통회의 예절은 개별적으로 미사 전에 해야 한다.

“예물을 그냥 두고…”

즉 “너의 미사가 나에게 필요치 않으니 급하게 서둘지 말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 무엇

보다 앞서 너를 기다리는 다른 미사가 있다. 즉, 먼저 너의 형제와 같이 화해하라. 그에게 네가 주어야 할 것들과 너의 사랑을 주라. 그 다음 나에게 와서 쉬운 이 미사를 드려라. 첫째 미사인 형제를 향한 사랑은, 둘째

미사인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유효하다는 표시이다.

“어떤 형제가 너와 등진 일이 있으면…”

첫째와 다른 경우이다. 즉 먼저는 네가 받은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이고, 지금은 네가 하느님께로 나아가기에

앞서 절대적으로 제거해야 하는, 자신이 행한 부당한 행위이다.

이렇듯이 힘차고 단순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행한다면 우리들의 생활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또한 하느님과 우리들의 관계가 얼마나 진실할까! 기도가 얼마나 효과적이고 강할까?

그렇지만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지켜야 할 그리스도의 이 지혜로운 규칙들을 외면하였고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기도는 계속 바리사이적인 기도이며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기도에 불과하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기도의 능력을 한 번도 체험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기도생활의 수첩에다 ‘잘못의 목록’을 기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즉 우리 자신에게 거리낌을 느끼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손해를 끼친 사람들에 대해서, 미사 전에 또 다른 신심 행위에 앞서 첫째로 ‘잘못의 목록’을 살펴 이 모든 잘못을 바로 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한다. 매일 우리가 우리들의 이기적인 면과 딱딱한 면을 똑바로 살펴본다면 얼마나 우리들의 마음이 변화되겠는가?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 참으로 위대한 스승이심을 고백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