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 신부님으로 1939년부터 13년간 중국에서 헹이앙(衡陽) 대목구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합니다. 1953년에 추방 당하여 본국에 귀환했다가 1955년에 우리나라에 오셔서 1956년 12월 거제성당에 부임하십니다. 더불어 거제성당 내에서 도나또 갈마리니(Donato Calmarini), 루이지 란떼리 (Luigi Lanteri) 신부님과 함께 임시 수도원을 구성하여 거제도 전역을 대상으로 전교활동을 합니다.
이듬해 1957년 6월에 진주 옥봉성당 7대 주임 신부님으로 이임하면서 취약한 서부 경남지역의 선교를 담당하시게 됩니다. 루이지 신부님은 리비아로 떠나시고, 도나또 신부님은 1959년 삼천포성당, 1961년 남해성당, 1965년 진주 칠암성당에 각각 초대주임으로 부임하십니다.
(가운데 안경을 쓰신 분이 꼬스탄죠 신부님, 오른쪽이 도나또 신부님, 왼쪽은 후임인 이상호 레이문도 신부님이십니다)
주 꼰스탄시오 신부의 활동
주 꼰스탄시오 신부는 옥봉 본당의 주임으로 먼저 본당 사목에 힘썼다. 교리반을 개설하고 레지오 마리애를 적극 양성하는 등 평신도들의 교회 협력을 유도하였으며, 진주 시내의 장재리와 인근의 의령, 하동, 산청을 두루 다니면서 공소 활성화에 전력을 쏟았다. 그리하여 1957년에는 4,500달러가 소요된 진주 옥봉 본당 수리를 마치기는 하였지만 사목의 주요 목표는 건축물이 아니라 신자 사목이었으므로 본당과 공소 사목에 큰 부분을 담당할 레지오 마리애를 1958년 1월에 시작하였다. 이 활동은 전교에 아주 효과적이어서 곧 두 개의 쁘레시디움으로 늘어났고, 그들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예비자는 늘어나고 냉담자는 줄어들었다. 주 꼰스탄시오 신부는 이렇게 전한다. “레지오는 본당 활동을 위해서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특히 그가 큰 기쁨을 가지고 힘쓴 일은 진주시 이현동 소재 구성원의 나환우들을 돌보고 교리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한편, 장재리 본당은 1938년 5월에 본당으로 설립되어 광복 직후인 1947년 7월까지 본당으로 명맥을 유지하여 오다가 사제가 없는 어려운 여건에 있었다. 1957년 주 꼰스탄시오 신부가 옥봉 본당의 사목을 맡으면서 장재리에도 열성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전교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그는 매주일 빠짐없이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집행하며 구호물자를 활용하여 구빈사업과 전교에도 온갖 정성을 쏟았다. 1961년 당시로서는 거액인 60만원을 들여 본당의 각종 부속 건물들을 일체 보수했다.
그런데 1950년대에 진주와 하동 사이의 교통 사정은 참으로 좋지 않았다. 하루에 단 한 번 왕래하는 기차를 이용하거나 2~3시간씩 걸려 먼지투성이의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다니는 버스를 타야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고문과도 같았다. 주 꼰스탄시오 신부는 이러한 와중에도 매월 공소 방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1959년 6월에는 부족한 공소를 넓혀서 장차 본당의 기틀을 만들기 위하여 대지 94평을 매입하여 공소 부지를 확장하였으며, 그 해 11월에는 기존의 공소 건물들을 전면 보수 하였는데 그 해 연말의 신자 수는 80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열성적인 선교에 힘입어 1963년말에는 신자수가 153명으로 늘었고, 1964년 9월에는 근교에 있는 나환우 마을인 영신원에 또 다른 공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는 공소를 위한 건물 한 채를 매입하였고, 1965년 3월에는 그동안 예비한 7명을 영세시켰는데, 이러한 결과 드디어 1965년말에 하동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1959년 3월에는 산청군 남부 지역의 교우들이 당시 부산 교구 최 요한 주교에게 요청하여 산청군의 남쪽 6개면(단성, 신안, 삼장, 신등, 시천, 생비량)은 옥봉본당 관할 지역이 되었다. 그것은 오로지 열성적인 주 꼰스탄시오 신부의 사목을 받고자 하는 신자들의 열망 때문이었고 또 그만큼 이들 교우들의 열성도 대단한 것이었다. 또 1959년 9월에는 신안면 장죽리에 대지 65평에 건평 39평의 시멘트 콘크리트의 공소 건물이 신축되었으며 1966년 11월 산청 본당이 설립되어 초대 본당 신부로 허정식(마태오) 신부가 부임할 때까지 남부의 6개 면에 생비량, 단계, 청현, 하정, 방목, 자양, 송강 그리고 장죽 등 8개의 공소가 새로 설립될 정도로 선교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1957년 10월 18일, 이탈리아 선교사들은 문산 본당의 사목을 맡았다. 원래 문산은 진주 부근의 읍으로 구교우들이 많아 1천 명 가량의 신자가 있었으며, 경남에서 부산, 마산에 이어 세 번째로 승격된 본당으로 유서 깊은 곳이었으나, 이 때에는 신자들간의 반목과 갈등이 심한데다 상주 사제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문산 성당은 진주와 사천 두 본당의 관할 아래에 있었으므로 진부 옥봉 성당 주임인 주 꼰스탄시오 신부와 사천 성당 주임 안 굴리엘모(Guglielmo Lauriola) 신부가 교대로 문산에서 성무를 집행하며 유치원 업무까지 돌보았는데 이러한 헌신적인 활동으로 반목하던 신자들도 다시 일치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미국의 가톨릭 구제회는 농산물의 잉여분을 가톨릭 교회를 통해서 한국의 가난한 이들에게 배분할 수 있는 권한을 미국 정부로부터 획득하였는데 진주 지역에는 매일 밀가루, 우유, 식용유 등의 분배권과 두 개의 극빈자 무료 배급소를 주 꼰스탄시오 신부에게 위탁하였다. 이러한 물질적인 도움은 많은 사람들을 가톨릭 교회로 이끌 수 있는 계기가 되어 평일에는 매일 3천명에게 식사를 제공하였고 가끔은 신자, 비신자를 불문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료품과 의류를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빈곤한 환경 속에서 복음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제에게 외부로부터 받는 도움의 손길도 없지 않았지만, 주 꼰스탄시오 신부에게는 항상 수입보다 지출이 더 많기 마련이었다. 또 그는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도 언제나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으나 이 당시 사목 활동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4,500달러가 소요된 삼천포의 사제관을 짓는 일과 진주 본당을 수리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이 힘든 일을 해 낼 수 있었다.
주 꼰스탄시오 신부와 강 도나또 신부는 함께 일을 계획하고 추진함에 있어 의견이 일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자, 비신자 할 것 없이 모두 이 두 선교사들을 존경하고 잘 협조하였다. 그러기에 개신교 신자들의 개종도 많았다.
한편, 주 꼰스탄시오 신부는 사도적 부름에 더 열성적으로 응답하기 위하여 더 많은 선교사를 제노바 관구에 요청했다. “한국은 프란치스칸의 정신을 사는 데 이상적인 곳이고, 앞으로 관구 설립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다른 나라의 선교지보다는 더 가능성이 큰 것 같습니다.”
* 성심원 40년사 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예수 성심의 마을] 78-80쪽
출처 : 거제성당 http://gj.cathms.kr
미라회 http://cafe.daum.net/mirahye
신부님은 산청 성심원의 실질적인 설립자입니다. 1980년 3월 31일 성심원 수도원에서 선종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