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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생명이 시동한다. 처음에는 즐겁게 용솟음치다가도 여러 가지 저항을 만나면서 차차 더디 움직인다. 그러다가 드디어 한낮에 다다르면 잠시 쉰다. 좀 있으면 다시 가라앉기 시작한다. 점점 고단해져 마침내 마지막으로 잠깐 다시 고개를 들었다가 밤의 침묵에 잠겨버린다.

 

   이렇게 일어났다가 가라앉는 한나절의 허리턱에 짤막하면서도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순간이 있다. 한낮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생명이 쫓기지 않기 때문에 앞을 내다보지 않는다. 아직 기울기 시작한 것도 아니고 뒤를 돌아다보지도 않는다. 아직 지치지 않고 더 나아갈 힘을 그대로 지닌 채 서 있다. 낮이 되면 생명이 순수한 현재에 머무는 곳이다. 그리고 멀리멀리 바라본다. 공간이나 시간으로는 아무 데에도 가지 않는다. 영원을 바라본다.

 

   한낮이라는 순간은 그 얼마나 심오하더냐. 온통 소음이고 침묵이나 명상이라곤 있을 수 없는 도시생활을 하는 이는 이 순간을 느껴볼 길이 없다. 그러나 한번 나가서 논밭을 지나면서 걸어보라지. 여름날 해가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 있고 아지랑이가 아른거릴 때 고요하고 넓은 풀밭에 나가보라지. 걸음을 멈추고 서면 모든 시간이 멎는다. 영원이 우리를 바라본다. 영혼은 어느 시간에나 우리에게 말을 하지만 한낮과 가깝다. 한낮에는 기다리고 있던 시간이 자신을 열어준다. 한낮은 순수한 현재, 하루의 충만이다.

 

 

   하루의 충만 - 영혼의 근접 - 기다림과 열림 - 멀리서 삼종소리가 들려온다 - 정숙한 낮에 해탈의 말을 전한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의 말씀이시었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

성령으로 잉태하셨도다 -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

이에 말씀이 사람의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

 

   인류의 한낮에도 때가 차서한낮이 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때가 차기를 기다리던 것은 한 인간 마리아에서였다. 마리아는 서두르지 않았다. 앞을 내다보지도 않고 뒤를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마리아 안에는 순수한 현재이며 영원으로 열려 있는 시간의 충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원이 이를 굽어보고 전령하니 영원한 말씀이 마리아의 조촐한 품안에서 혈육이 되셨다.

 

   삼종은 이 비사(泌事)를 우리의 하루에 알린다. 그리스도 신자의 한낮에는 인류의 한낮의 신비가 거듭 되산다. 모든 시절을 통하여 역사의 때가 찼음이 들려온다.

 

   우리의 한평생도 영원에 가까운 것이라야겠다. 우리 안에도 늘 영원을 향해 열려 있고 귀를 기울이는 고요가 있어야겠다. 그러나 우리 삶은 시끄럽게 그 소리를 덮어버린다. 그런 만큼 적어도 삼종기도를 바치는 한낮의 그 시간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서서 만물이 고요에 잠겼을 때 어좌에서 내려오신 영원한 말씀의 신비에 귀를 기울여야겠다. 일찍이 역사적으로 한번 내려오신 그 말씀은 각자의 영혼에 거듭거듭 새로 내려오신다.

 

   이 조용한 순간에 잠기면 같은 고요에 서 있는 다른 모든 이들과 그 얼마나 하나가 되는 느낌인가. 그 얼마나 깊이 통하여 마음으로 서로 인사하고 축복할 수 있는가.

 

로마노 과르디니 - 거룩한 표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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