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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3 22:01

욥의 기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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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기도 1에 이어..

 

욥은 당대의 종교 전통에 젖은 친구들의 충고와 조언을 거부하며 정의가 왜곡되는 상황을 정직하게 고발한다. “나의 권리를 박탈하신 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시는 한 내 영을 쓰라리게 하신 전능하신 분께서 살아계시는 한 나에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하느님의 숨이 내 코에 있는 한 맹세코 내 입술은 허위를 말하지 않고 내 혀는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나는 결단코 자네들이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없네. 죽기까지 나의 흠 없음을 포기하지 않겠네. 나의 정당함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며 내 양심은 내 생애 어떤 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리라.”(27,2-6) 그는 맹목적으로 고통을 끌어안지도 않고, 하느님 앞에서 분노와 좌절을 드러내기를 주저하지도 않는다. 욥이 하느님과 시비를 따지려 하는 것은 그가 단순히 고통을 받아서가 아니라, 원인 모를 고통과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믿음이 자신 안에서 서로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주님에 대한 경외심을 두고 말할 때, 모든 것을 도로 가져가신 주님을 찬미하는 욥이, 의인을 고통 받도록 버려두시는 하느님을 비난하는 욥보다 결코 더 경건하다고 할 수 없다.

 

 

  욥은 하느님께 정식으로 고소장을 드리며 말문을 닫는다. “, 제발 누가 내 말을 들어 주었으면! 여기 내 서명이 있다. 이제는 전능하신 분께서 대답하실 차례! 나의 고소인이 쓴 고소장은 어디 있는가? 나 그것을 반드시 내 등에 지고 다니며 면류관처럼 그것을 두르련만. 그분께 내 발걸음을 낱낱이 밝히고 나 제후처럼 그분께 다가가련만.”(31,35-37) 이로써 욥은 의인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정식으로 하느님께 제기한다. 욥의 소명은 불가사의한 고통 한복판에서도 어떻게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섬겨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욥의 기도는 욥이 친구들의 질타와 충고를 듣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 내놓은 독백과 한탄 사이에 끼어 있다. 여기서는 첫 번째 기도와 마지막 기도만 다루었는데, 이 기도 말고도 욥기의 운문에는 기도가 다양한 내용으로 여러 번 나온다. 첫 번째 기도에서 욥은 자신이 처한 딱한 처지를 하소연하며, 자신의 덧없는 목숨이 저승의 문턱에 서 있음을 하느님께 상기시켜 드린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저를 바라보던 이의 눈은 저를 보지 못하고 당신의 눈이 저를 찾는다 하여도 저는 이미 없을 것입니다.”(7,7-8) 그러나 욥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과 고통을 그저 참고만 있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 몸은 입을 다물지 않겠습니다. 제 영의 곤경 속에서 토로하고 제 영혼의 쓰라림 속에서 탄식하겠습니다.”(7,11) 이어서 욥은 하느님께 왜 자신을 바다와 용으로 여기시느냐고 항변한다. “제가 바다입니까? 제가 용입니까? 당신께서 저에게 파수꾼을 세우시다니.”(7,12) 바다와 용은 고대 근동 신화에서 질서의 신에 맞서는 혼돈의 세력이다. 하느님은 욥을 적으로 생각하여 감시하시고, 그가 잠들 때조차 악몽과 무서운 환시로 세차게 몰아붙이시니 욥은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욥은 이런 고통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말한다.(7,12-15)

 

 

  욥은 자신이 당하는 시련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제발 내버려 두시라고 호소한다. “저는 싫습니다. 제가 영원히 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제가 살날은 한낱 입김일 뿐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는 그를 대단히 여기시고 그에게 마음을 기울이십니까?”(7,16-17) 욥은 자신이 설령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께 무슨 해가 되겠느냐고 묻는다. 욥으로서는 하느님이 왜 자신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는지, 왜 그냥 보아 넘기지 않으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 죽은 뒤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텐데 어찌하여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는 자신을 감시하고 반대의 표적으로 삼으시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제면 제게서 눈을 돌리시렵니까? 침이라도 삼키게 저를 놓아주시렵니까? 사람을 감시하시는 분이시여 제가 잘못했다 하여도 당신께 무슨 해를 끼칠 수 있습니까? 어찌하여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께 짐이 되었습니까? 어찌하여 저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저의 죄악을 그냥 넘겨 버리지 않으십니까? 제가 이제 먼지 위에 누우면 당신께서 찾으셔도 저는 이미 없을 것입니다.”(7,19-21)

 

 

  욥과 친구들 사이의 격렬한 담론이 오간 다음에 마침내 하느님이 폭풍 속에서 나타나신다. 욥과 친구들은 하느님의 발현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발현으로 욥과 친구들 사이에 누구 말이 옳은지 판가름 나지는 않는다. 하느님의 발현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분의 창조적 지혜와 권능이다. 하느님은 고통의 문제에서 당신 위업의 신비로 갑자기 말머리를 돌리신다. “지각없는 말로 내 뜻을 어둡게 하는 이자는 누구냐? 사내답게 네 허리를 동여매어라.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네가 그렇게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38,2-4) 욥의 항변을 줄곧 듣고 계시던 하느님은 이제 욥에게 그가 답변할 후 없는 질문들을 쉴새 없이 퍼부으신다.

 

 

  이로써 하느님은 상선벌악의 문제를 회피하시려는 것일까? 욥에게 하신 하느님의 질문들은 상선벌악의 문제를 덮어 버리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욥은 하느님이 가까이 계실 때에는 전능하지만 억누르는 분이시고, 반대로 멀리 계실 때에는 인간의 고통에 냉담한 분이시라고 불평하였다. 그래서 저승의 문턱에 서 있는 자신을 내버려 두시라고, 관심조차 갖지 마시라고 하소연하였다. 욥의 친구들은 하느님을 상선벌악의 원리대로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시는 심판자로 묘사하였고, 욥은 하느님을 매정하신 분이라고 몰아세웠다. 그러나 발현 가운데 하신 두 말씀에서 밝혀진 하느님의 모습은 이런 하느님상과 사뭇 다르다.

 

 

  하느님은 권능을 지니시지만, 그 권능은 사람들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당신의 놀라운 위업에 초대하여 탄복시키기 위한 것이다. 또한 그분은 초월자이시지만, 해산하는 바위 산양과 산고를 치르는 사슴까지 돌보는 자상한 분이시다(39,1). 하느님은 송사를 요청한 욥에게 준엄한 심판관으로 나타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욥에게서 잘못을 찾아내어 형벌을 선고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열어 주시기 위하여 찾아오신다. 하느님은 결코 상선벌악의 원리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시다. 상선벌악의 원리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해명할 수 없다. 그분이 욥에게 던진 수많은 질문은 그를 고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당신과 당신의 위업에 관한 신비를 가르치시려는 것이다.

 

 

  욥은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완전히 압도당하여 할 말을 잊는다.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40,4-5) 첫 번째 기도에서 입을 다물지 않겠다고 한 욥인데, 여기서는 손을 입에 갖다 대고 더 이상 항변하지 않겠다고 한다. 욥은 하느님의 전능을 온전히 인정한다. 그분은 당신의 뜻과 계획을 언제 어느 때라도 완벽하게 실행할 수 있는 분이시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서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42,2)

 

 

  하느님의 인격적인 계시는 욥으로 하여금 주님의 권능과 지혜, 영광, 사랑에 관하여 더 이상 의심을 품지 못하게 하였다. 이제 고통은 더 이상 그를 짓누르지 않는다. 하느님이 고통을 허락하신 데에는 어떤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이다. 고통 역시 하느님이 당신의 지혜와 선의로 창조하신 세상에서 중요한 몫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욥은 전에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믿음과 신뢰를 바친다. 하느님의 활동은 상선벌악의 원리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보다 훨씬 더 크고 더 많은 신비스러운 일들에 관여한다.

 

 

  욥의 불평과 호소는 그의 정직함을 증명할망정 그의 불경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특히 머리말에 묘사된, 갑자기 닥친 불행에 대한 욥의 반응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사심 없이 공경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이 세상 모든 것 위에 섬김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권능과 지혜와 사랑을 갖춘 분이시고, 하느님과 우리 사이는 장삿속으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서학계에서는 욥기의 배경을 바빌론 유배기로 보는 데에 별다른 이견이 없다. 욥기의 저자는 조국을 멀리 떠나 남의 나라 땅에서 혼돈과 절망의 삶을 이어 가는 유배자들의 생각을 욥의 하소연과 하느님에 대한 원망으로 표현한다. 유다의 멸망과 바빌론 유배로 드러난 하느님의 징벌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우상 숭배에 빠진 주변의 다른 민족들과 비교할 때, 그들의 잘못이 지금 겪는 고통에 합당하지 않다고 믿었다. 그러나 욥기의 저자는 다른 자연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생각이나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해득실을 따지는 태도는 참된 믿음과 거리가 멀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불행과 고통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지존하신 하느님의 섭리와 권능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욥기는 고통을 주제로 펼쳐지는 한 편의 드라마다. 고통을 깊이 체험한 이들은 이 드라마를 더욱 잘 이해하고 유익한 통찰을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은 삶의 일부다. 아무도 고통에서 자유롭지 않다. 고통을 받는 이는 다른 사람들은 다 행복한데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하며 외로움과 분노를 느낀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욥처럼 사랑하는 가족들을 다 떠나보내고 자신도 병에 걸린 상태에서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할지도 모른다. 고통에 대한 수많은 설명이 있겠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에 와닿지 않고 적절한 해답이나 위로가 되지 못한다. 고통의 원인을 찾다가 쉽사리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스스로 죄책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럴 때 이웃의 충고와 위로는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모두 욥기에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앞에 인용한 욥의 기도에서처럼, 이런 상황에서 고통받는 인간은 고통의 불가사의한 현실을 받아들이며 초월자 하느님의 권능과 자애로운 섭리에 위탁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고통의 불가사의한 의미가 밝혀지고 인간의 고통에 하느님이 동참하시기 위해서는, 욥기의 저자가 살던 시대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때까지 6백여 년이라는 세월을 더 기다려야 한다. 예수님이 수난을 앞두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바치신 기도는 산문에서 욥이 자신에게 닥친 시련과 고통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바치신 기도는 자신의 고통에 항변하는 운문의 욥을 연상시킨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예수님의 강생과 죽음으로 하느님은 친히 고통받는 이들의 공동체에 들어오신다. 우리는 고통 한복판에서 그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그분께 위로를 받으며 고통의 참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 - -

 

 

나는 주변에서 고통 때문에 주님을 찾기도 하고 고통 때문에 주님을 버리기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다. 평소에 믿음이 있는 사람은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는 반면, 평소에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은 고통을 당할 때 하느님과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며 때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한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예수님도 고통을 싫어하셨고 할 수만 있으면 피하려고 하셨다. 그러나 고통을, 하느님이 믿음을 성숙하게 하려고 보내시는 시련으로 받아들이거나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좀 더 순수하게 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면, 고통이 큰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과거에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뇌졸중으로 쓰러져 3년씩 중풍을 앓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먼저 쓰러지시고 1년 뒤에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1년 뒤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두 분이 병중에 계시던 4년 동안, 우리 가족은 그 어느 때보다 서로 화목하게 지냈다. 우리는 한 달에 적어도 한 번은 부모님이 계시는 큰형님 댁에 모였고, 형님 내외와 조카들이 부모님의 병수발을 정성껏 드는 모습을 지켜보며 감동을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떠나보낸 다음, 큰형님이 눈물을 글썽이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기동력이 없으셨지만 어머니가 방에 누워 계실 때는 집을 잠깐 비워도 든든한 생각이 드는데, 어머니가 안 계시니 집안이 텅 빈 것 같아.” 형수님도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지금도 어머니 계시던 방문을 열고 어머니!’ 하고 부르는 게 습관이 되었어요. 이젠 방문을 열어도 어머니가 안 계시니 얼마나 서운한지요.” 하셨다.

 

 

  아버지는 비교적 평온하게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통증을 많이 느끼신 편이었다. 그런 날에는 어머니 곁에서 우리는 조용히 묵주 기도를 바쳤다. 어머니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서였다. 가죽과 뼈만 남은 모습의 어머니는 자식들에 대한 맹목적이고 본능적인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보여 줄 것이 없었다. 서울에서 바쁘게 지내다 한 번씩 내려오면, 밥상 머리에 앉은 어머니는 움직이실 수 있는 한쪽 손으로 내 밥그릇을 가리키며 자꾸 더 먹으라는 신호를 보내셨다. 저녁상을 물리가가 무섭게 어머니는 자리를 깔으라는 몸짓을 하시고 초저녁부터 내 손을 잡고 누우셨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 속을 무척 태웠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 때에 어렵사리 태어났는데, 갓난아기를 먹일 어머니의 젖이 말라붙어서 옆집 아이 엄마의 젖을 동냥하여 먹일 수밖에 없었다. 젖을 배불리 먹지 못해서인지 나는 어릴 때부터 형제들 가운데 유난히 병치레가 잦았다. 고통이 어머니와 나를 그처럼 끈끈하게 묶어 주었다.

 

 

  고통 그 자체는 무가치하지만 고통 속에서 사랑이 보석처럼 빛날 수 있기 때문에 고통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나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 그리고 하느님이 고통 자체가 되어 이 세상에 육화하신 이유를 알 것 같다.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사랑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누구나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한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안다. 때로는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도 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병들고 추하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다가올 때는 외면하고 그들에게서 도망치려 한다. 그럴 때 사랑할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인데도 말이다.

 

 

  또한 고통은 하느님이 우리를 성장시키시는 중요한 수단이다. 고통은 우리의 소명을 확인시켜 주고 소명에 임하는 지향을 순수하게 하며 우리의 믿음을 튼튼하게 한다. “너희는 마치 사람이 자기 아들을 단련시키듯, 주 너의 하느님께서 너희를 단련시키신다는 것을 마음 깊이 알아 두어야 한다.”(신명 8,5) 하느님은 우리를 징벌하시기 위해서만 시련과 박해를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다. 시련과 박해가 처음에는 징벌로 주어졌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참회의 기회를 넘어 도약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바빌론 유배를 하느님의 징벌로만 보지 않고 민족 전체의 정화와 쇄신의 발판으로 삼았던 것과 같다. 바빌론 유배를 제2의 출애굽으로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련과 박해를 통해서 우리는 믿음과 정화의 새로운 단계로 도약한다.

 

 

저희에게 고통과 시련을 허락하신 하느님, 고통과 시련에도 아랑곳없이 당신을 섬기게 하시고 고통과 시련 안에서 당신 섭리에 대한 신비의 새로운 지평을 보게 하소서. 또한 고통과 시련을 통하여 제 자신을 정화하고 제 믿음을 깊게 하여 주소서.

 

- 정태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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