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 마태 7,7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 요한 1,14
“자녀에게 어떻게 좋은 선물을 주어야 하는지 알고 계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을 명하신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소원을 알리기 위해 애쓰지만 그분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분은 기도를 통해 그분이 주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받으려고 하기를 바라신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 하느님이 왜 그런 명령을 내리시는지 몰라 당황하게 된다. 그분의 선물은 매우 크고 우리는 작아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제한되어있다.”
성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우리 대부분은 하느님께 너무나 빈약한 것을 기대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우주 전체라도 주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개미무덤을 손에 넣으려고 애쓴다.”
토마스 키팅 「새로운 각성」
토팔 왕국 전체에서 평범한 농부의 딸 가일라만큼 사랑스러운 아가씨는 없었다. 그녀가 웃으면 온 세상이 웃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가일라는 열여덟 살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경박하고 철이 덜 들어 천박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렇다고 머리가 산만하거나 지혜가 모자라지는 않았다.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가일라는 모든 면에서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다만 아직도 싸구려 장신구에 열을 올리고 낭만적인 백일몽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온갖 자질구레한 일에 곧잘 인내심을 잃곤 했다. 그러나 토팔 왕국에 사는 열여덟 살짜리 아가씨들 중 어느 누가 그런 어리석은 짓에 완전히 면역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시간과 경험이 언제나 그것을 바로잡아나가는 법이다. 물론 가일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매우 특이한 상황에서였을 뿐.
토팔 왕궁은 훌륭한 왕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20대 초반의 아주 잘생긴 왕이었다. 이름은 에릭이고 한 인간에게, 전제군주에게 바랄 수 있는 훌륭한 자질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 어느 날 에릭 왕은 우연히 가일라네 농장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날 왕의 일행은 말을 타고 장시간 달렸기 때문에 목이 몹시 말라 농부의 집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농부의 집에는 그들에게 제공할 신선한 우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일행은 농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 젊은 왕에게 우유를 들고 다가간 사랑스러운 가일라는 난생 처음 가까이에서 왕을 보게 되었다. 에릭 왕 역시 그렇게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우아함을 갖춘 여성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왕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한편 가일라는 왕에게 사랑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녀는 왕의 잘생긴 용모와 고귀한 옷차림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뿐이다. 그 중에서도 왕이라는 사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아직도 어린애 같은 가일라에게 그 사실 외에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온 마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기 우해 그 사건의 자세한 내용을 모조리 머리속에 기억했다. 그녀가 임금님에게 마실 것을 직접 가져갔다고 하면 많은 친구들이 자신을 얼마나 부러워하겠는가! 그런데 그 첫 번째 만남이 에릭 왕과 가일라 두 사람의 인생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사실 가일라를 처음 본 젊은 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의 마음을 얻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두 사림이 언젠가는 결혼해야 한다고 결정내린 것이다. 에릭 왕은 잘생긴 만큼이나 현명했다. 잠시 만나봤을 뿐이지만 이 아가씨가 훌륭한 아내가 되기에는 아직 미숙한 상태임을 알아본 것이다. 그녀는 단련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훌륭한 여성으로 성장할 시간과 기회를 주어야 했다. 그녀는 분명히 그런 소질을 갖고 있으므로 적절한 상황만 주면 되었다. 그래서 에릭 왕은 신하들과 함께 수도로 돌아오며 가일라를 어떻게 하면 원숙한 여성으로 만들 수 있는가에 관해 골똘히 생각했다. 며칠이고 몇 주일이고 왕은 이 문제에 대해 궁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은 드디어 자신이 찾던 것을 발견했다. 자칫하면 자신의 옥좌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었지만 목적을 성취할 유일한 계획이었으므로 왕은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그날 바로 왕은 지위가 높은 귀족 세 사람을 거느리고 가일라네 농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왕은 가일라를 불러 그녀의 부모 앞에서 이상한 약속을 했다.
“친애하는 가일라, 당신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요구하시오. 그것이 충분히 가치 있다면 당신에게 주겠소. 이것을 당신 부모와 고위한 영주 세 사람 앞에서 엄숙히 맹세하오. 신중히 생각하시오. 나는 석 달 후 다시 찾아오겠소. 그러나 당신이 원하는 것이 내 눈에 충분히 가치 있지 않을 경우에는 미안하지만 그것을 주지 않겠소. 내 말을 이해하겠소?”
그 후 석 달 동안 그녀와 그녀의 부모와 친구들, 그들이 사는 마을사람 전부가 무엇이 왕의 눈에 충분히 가치 있는 물건인지에 관해서 머리를 모았다. 수많은 제안들이 연구대상이 되었지만 농부의 딸에게 적합한 것은 당연히 제한되어 있었다. 최고급 물레, 결혼지참금, 암소 한 마리, 새로운 외양간, 장식선반 등. 마침내 상상력을 발휘한 누군가가 가난한 농사꾼들에게는 분명 최고의 사치품인 금반지를 제의했다! 터무니없는 발상이었지만 에릭 왕은 관대하기로 소문이 나있지 않은가! 그래서 결국 가일라는 금반지를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그처럼 큰 것을 요구한 그녀의 대담성에 왕이 화를 낸다면 그것은 모두 그가 자초한 일이라고 가일라는 신경질적으로 생각했다. 즉, 왕은 그들의 조용한 생활을 방해하러 찾아오지도, 그 바보 같은 제의를 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안 그런가? 왕의 기분이 상한다면 그것은 그의 문제지, 그녀의 문제는 아니었다!
석 달이 지나자 약속대로 젊은 군주는 지난번에 거느리고 왔던 영주 셋과 함께 농장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모두 농장의 안방에 모여 앉았다. 물론 가일라와 그녀의 부모와 가까운 친척들도 동석했다. 왕이 가일라에게 어떤 선물을 원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왕이 자신의 불합리한 요구에 크게 화를 낼 것이라고 확신하며 거의 반항적인 태도로 말했다.
“순금반지입니다.”
가일라는 알 수 없는 공포로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그러자 에릭 왕의 얼굴이 실망으로 어두워지며 말했다.
“미안하게 되었소. 하지만 그것은 충분히 가치가 있지 않소. 나는 그냥 평범한 금반지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당신에게 주고 싶소.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은 아니오. 석 달 후에 다시 오겠소. 아마 좀 더 깊이 생각하면 내가 마음속에 품은 진정 가치 있는 것을 제의할 수 있을 것이오. 잘 있어요, 아름다운 아가씨.”
그리고 왕은 떠나갔다. 자연히 가일라는 왕의 반응에 크게 당황했다. 도대체 왕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어쨌든 그 다음 석 달도 이전의 석 달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왕의 생각을 추측하느라 지나가버렸다. 또다시 왕의 의견, 즉 농부의 딸에게 적합하며 금반지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마을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마침내 누군가 환상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서 진주 목걸이를 제의했다. 상황을 감안할 때 상식을 충분히 벗어난 의견으로 판단되었다. 그래서 왕이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 가일라는 애교스럽게 진주목걸이를 원한다고 했다. 이번에도 그녀는 왕이 화를 내며 너무 비싼 것을 요구했다고 꾸짖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에릭 왕은 다만 그녀가 그 이상의 것을 감히 요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상냥하게 자신의 제의를 되풀이하고 다시 석 달 후에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 또다시 가일라는 왕의 태도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좋다, 그렇다면...!’ 그녀가 결론을 내겼다. 왕이 최고의 것을 선택하라며 그녀를 바보로 만들려고 한다면 왕에게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어야지! 뻔뻔스러운 제의를 한 젊은 왕이 후회하는 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건방진 열망으로 가일라는 궁정의 귀부인들조차 충격적이라고 생각할 물건을 요구하기로 결심했다. 다름 아닌 다이아몬드를 박은 관이다!
아아, 슬프다! 가일라는 에릭 왕의 다음 번 방문에도 다시 실망을 맛봐야 했다. 다이아몬드 관도 왕이 생각하는 그 가치에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은 가일라에게 또 다시 석 달의 기회를 주었다. 관대한 체하면서 자신을 우롱하는 젊은 군주의 가면을 벗기고 싶은 일념에서 가일라는 상식의 한계를 뛰어넘기로 결심했다. 즉, 성 한 채를 요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성도 너무 작다는 것을 가일라는 석 달 뒤 배우게 되었다. 왕은 그녀에게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왕이 그녀에게 말했다.
“아니오, 지방 하나로도 충분하지 않소. 기회를 한 번 더 줄까요?”
또다시 석 달이 지나고 왕은 커다란 슬픔의 빛을 담고 가일라에게 말했다.
“왕국 전체를 줘도 모자라오.”
그러나 이 마지막 만남에서 왕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전혀 새로운 제의를 추가했다.
“아름다운 가일라, 나는 일 년 후에 돌아와서 당신의 요구를 듣겠소.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오. 내가 당신에게 내 왕국보다 훨씬 중요한 무엇을 주려고 하는지 상상할 수 없다면 그때는 두 번 다시 나를 볼 수 없을 것이오.”
왕이 그녀를 남겨놓고 떠난 뒤 가일라는 왠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상한 일이지만 자신에게 오로지 극진한 친절만 베풀고 게다가 외모도 멋진 젊은 왕을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니까 더할 수 없이 슬퍼졌다. 기다리는 일 년 동안 그녀의 마음은 자꾸 에릭 왕의 모습과 그의 독특한 매력, 뛰어난 개성 등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생각에 잠겨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에릭 왕을 알고 나서 자기가 크게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는 좀 더 사려 깊고 신중하게 반응하며 사물을 예전보다 진지하게 보게 된 것이다. 분명히 지난 2년 사이게 그녀는 에릭 왕의 기대 덕분에 많이 성숙해져 있었다. 사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왕이 자기에게서 무엇을 이끌어내려는지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정으로 왕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자 깜짝 놀란 것이다. 바로 그때 갑자기 깨달았다. 자기가 왕을 사랑한다는 것을! 그리고 처음부터 에릭 왕은 그녀가 자기에게 끌리기를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왕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았다. 그것은 그의 왕국보다도 귀중했다. 이제 가일라는 왕과 다시 만날 날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두 사림이 만나는 순간 가일라는 왕을 새로운 눈으로 보았다. 그렇다. 지금 그녀는 온 마음으로 왕을 사랑하고 있었다. 가일라는 왕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제가 폐하께 요구하는 것은 폐하의 왕국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 바로 폐하 자신입니다. 폐하의 사랑이며 폐하의 인생입니다.”
물론 그것이야말로 에릭 왕이 매번 그녀가 자신에게 요구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왕도 이제 자기 앞에 서있는 가일라가 새로운 가일라이며 자신의 아내로서 충분한 자질을 갖춘 가일라임을 알 수 있었다. 에릭 왕은 왕위를 포기하고 가일라와 결혼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바로 그 마을에서 소박한 농사꾼으로 살기 위해 그는 성을 버리고 떠나왔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여생을 조용히 보냈다. 토팔 왕국의 연대기에는 왕국 전체에서 그 두 사람보다 더 행복한 부부는 없었다고 기록되었다.
내 발의 등불 - 닐 기유메트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깊고 크신지 아직도 저는 잘 모르고 살아가고 있나봅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