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Manificat anima mea)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를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로다.
그 인자하심은 세세 대대로
당신을 두리는 이들에게 미치시리라.
당신 팔의 큰 힘을 떨쳐 보이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도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올리셨도다.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자비하심을 아니 잊으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으니
이미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위하여
영원히 우리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바로다.(성무일도)
(…) 마리아의 노래는 전통적으로 대중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의 첫 낱말을 따서 ‘마니피캇Manificat’이라 불리고 교회의 공식 기도인 시간 전례(성무일도)에 포함되었다.
(…) 루카 복음서를 보면 이 노래는 친척인 엘리사벳의 축하 인사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이다. 노래 전편에 흐르는 주제는, 하느님의 자비와 권능이 그분을 경외하는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 놓으신다는 믿음이다. 마리아의 노래는 ‘찬미가’ 또는 ‘감사 시편’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마니피캇’으로 불리는데, 이 말은 ‘들어 높이다’, ‘찬양하다’라는 뜻이다.
(…) 마리아의 노래는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46절에서 49절은 비천한 여종인 마리아 개인에게 하신 하느님의 위업을 찬미한다. 50절에서 53절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 교만한 자들, 권세 있는 자들, 미천한 이들, 굶주린 이들, 부유한 자들로 대표되는 인간 공동체에 하신 위업을 기린다. 마지막으로 54절에서 55절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성조들과 맺으신 옛 계약에 따라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완전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강조한다. 특히 하느님의 위업 앞에서 노래하는 이의 영혼과 마음이 큰 기쁨에 사로잡힌다는 표현은 신약 성경의 여러 찬가들 가운데서도 보기 힘들다.
첫째 부분에서 46절과 47절은 정확하게 병행을 이룬다. 두 구절을 직역하면 이렇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영이 내 구원자 하느님에 대하여 기뻐하노니”
‘내 영혼’은 ‘내 영’과 병행을 이루는데, 둘 다 ‘나’라는 존재를 대변하는 인격체의 가장 깊은 내면을 가리킨다. 그다음 ‘주님’과 ‘내 구원자 하느님’도 병행을 이룬다. ‘주님’은 하느님을 세상의 주인이요, 최상의 통치자로 고백할 때 쓰는 호칭이며, ‘내 구원자 하느님’은 이어지는 문맥으로 볼 때 마리아 개인의 영적 구원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 또는 종말론적 변혁을 이루시는 분을 염두에 둔 호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주님’과 ‘구원자 하느님’은 모두 세상의 주권자요, 통치자를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주님을 찬양하다’와 ‘하느님에 대하여 기뻐하다’도 비슷한 뜻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구원적 위업을 보고 기뻐한다는 것은 그분을 찬양한다는 말과 상통한다. 마리아는 ‘내 존재 깊은 곳에서부터 주님을 들어 높이고, 구원하시는 그분의 위업을 보고 기뻐한다.’라는 고백으로 노래를 시작한다.
48절 전반부는 마리아가 왜 하느님을 찬양하는지 그 이유를 밝힌다.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마리아는 자신을 ‘종’이라고 부름으로써 46절에서 47절의 ‘주님’과 ‘구원자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종속적이고 낮은 위치에 내려놓는다. ‘돌보신다’는 표현은 자애롭게 굽어보신다는 뜻이다. 종의 언급은 이 구절과 루카 복음서 1장 38절을 연결한다. 38절에서 마리아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하고 온전히 순종했다.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라는 마리아의 말은 구세주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기 위하여 하느님이 나자렛의 지극히 평범한 처녀를 특별히 선택하신 사실을 가리킨다. 나자렛은 구약 성경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곳이요, 마리아라는 이름도 한국의 ‘영자’, ‘순자’처럼 그 당시 아주 흔한 여자 이름이었다. 더구나 마리아는 당신이 구세주의 어머니로 간택되리라는 사실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으니 주님의 위업이 여간 놀랍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마리아의 노래는 루카 복음서를 볼 때, 가브리엘 천사를 시켜 전달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마리아가 받아들이고 곰곰이 묵상하는 가운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온 찬미의 기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마리아의 소명과 위대함이 드러난다. 마리아는 구세사의 중요한 몫에 불림을 받았다. 그것은 구세주 예수님을 세상에 낳고 돌보는 일이었다.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통하여 이 소명을 확인한 다음, 마리아는 하느님이 주신 소명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그분의 구원 계획에 완벽하게 협력하였다.
48절 후반부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이 마리아를 감싸며 모든 것이 변할 것임을 예고한다.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만세’, 곧 모든 세대 사람이 마리아를 축복할 것이다. 그들 가운데 첫 사람이 친척 엘리사벳이다. 마리아가 축복을 받게 되는 이유는 49절에서 나온다. “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로다.” 능하신 분, 거룩하신 분이 마리아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에 모든 이가 마리아를 축복할 것이다. ‘능하신 분’, 곧 ‘전능하신 분’이라는 호칭은 다시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이는 하느님의 약속은 마리아에게서 어김없이 이루어졌다. 구약 성경과 유다교 문헌에서 ‘전능하신 분’이라는 표현은 흔히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싸우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전사(戰士) 하느님을 가리킨다. 당신의 크신 능력으로 마리아에게서 구세주 예수님을 낳게 하신 하느님은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다. 히브리어에서 ‘거룩하다’는 동사는 본디 ‘구별짓다’, ‘갈라놓다’는 의미를 담는다. 그분의 거룩함은 윤리적 거룩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통치자로서 당신의 고유한 주권을 누구의 방해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사하신다는 뜻이다(이사 57,15). 결국 ‘전능하신 분’과 ‘거룩하신 분’이라는 호칭에는 마리아에게 잉태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크신 능력으로 구원하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둘째 부분부터는 하느님이 당신을 경외는 ‘주님의 남은 이들’ 또는 ‘주님의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밝힌다. “그 인자하심은 세세 대대로 당신을 두리는 이들에게 미치시리라.” ‘인자하심’은 구약 성경 히브리어 ‘헤세드’를 옮긴 말인데, 이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맺으신 계약대로 그들에게 베푸시는 성실한 사랑, 한결같은 영원한 사랑을 가리킨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보통 ‘자애’로 옮긴다. 마리아가 체험한 하느님의 자애는 그분을 ‘두리는’ 모든 이가 체험할 것이다. ‘두리는’은 ‘두려워하는’의 예스러움 표현이다.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징벌에 대한 공포를 뜻하지 않고, 자녀가 부모를 대하듯 하느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경외하다’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는 하느님의 지위와 권위를 인정하는 모든 이를 가리킨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며 그분의 길을 걷고(신명 7,9) 뉘우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사 57,15)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거룩하고 높은 지위를 인정하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다른 이들처럼 그분의 위업을 보고서 그분을 찬양한다. 50절은 마리아의 노래에서 전환점이다. 마리아는 자기에게 하신 하느님의 위업에서 당신 백성과 하느님을 경외하는 모든 이를 위한 위업으로 관심을 돌린다. 루카는 이 전환을 통하여 독자들도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위업을 기리기를 바란다.
마리아의 기도 2에 계속...
정태현 신부(부르심받은 이들의 부르짖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