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본문시작

2019.04.26 11:39

"교환의 신비"

조회 수 541 추천 수 2 댓글 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부활 시기, 미사 경문에 많이 등장하는 "교환의 신비"에 관한 교황님의 묵상글 나눕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성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 강론
(성 베드로 대성전, 2007년 4월 5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러시아 작가 레오 톨스토이의 짧은 이야기 가운데 사제와 현자들에게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명령한 어떤 사나운 임금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자는 이러한 임금의 요구를 들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들에서 막 돌아온 양치기가 사제와 현자의 과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양치기는 임금의 눈이 좋지 않아서 하느님을 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하느님께서 무엇을 하시는 분인지만이라도 알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양치기는 임금에게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리가 옷을 서로 바꾸어 입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임금은 주저하면서도 기대하는 답이 너무나 궁금하여 양치기의 말대로 하였습니다. 임금은 양치기에게 자신의 왕실 예복을 주고 자신은 가난한 양치기의 남루한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자 답이 나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일을 하신 분이십니다.” 사실 참된 하느님에게서 나오신 참된 하느님이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하느님의 호화로움을 벗어 버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필리 2,6 이하 참조).

 

 

교부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교환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받아 주님과 같아지게, 주님께서는 우리의 것을 받으셨습니다.

 

 

세례 때 일어나는 일에 관하여 바오로 사도는 정확히 옷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 이러한 일이 세례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입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옷을 주시는 데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와 실존적 친교를 이루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존재와 우리의 존재가 하나가 되어 상대방 안에 파고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서 2장 20절에서 자신의 세례를 설명하며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옷을 입으셨습니다. 사람이 지니는 고통과 기쁨, 배고픔과 갈증, 피로, 희망, 절망, 죽음에 대한 공포 등, 죽음까지를 포함하여 우리가 지닌 모든 걱정거리를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당신의 ‘옷’을 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서에서 단순히 세례라는 ‘사실’로 말한 것을 에페소서에서는 계속 수행해야 하는 과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은 …… 옛 인간을 벗어버리고, ……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벗어 버리고 ‘저마다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지체입니다.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에페 4,22-26 참조).

 

 

이러한 세례의 신학은 사제 서품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고 새로운 중요성을 띠고 다시 나타납니다.

 

 

세례를 통하여 ‘옷의 교환’, 운명의 교환, 그리스도와 새로운 실존적 친교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사제직에서도 교환이 이루어집니다. 성사를 거행할 때 사제는 그리스도로서(in persona Christi) 행동하고 말합니다. 거룩한 신비 안에서 사제는 자기 자신을 보여 주거나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사를 거행할 때, 사제는 사제가 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사제품을 받을 때 “예, 여기 있습니다.”(Adsum)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이것을 표현하였습니다.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도구로 써 주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셔서 ……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도록 하신”(2코린 5,15 참조) 분의 처분에 우리를 맡긴 것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처분에 맡긴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모든 사람을 위한’ 일에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하여 참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서(in persona Christi): 사제 서품식 때 교회는 사제에게 제의를 입게 함으로써 ‘새로운 옷’을 입는 현실을 눈으로 보고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외적인 행위를 통하여 내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내적 사건에서, 우리의 임무인 그리스도를 입는 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우리를 그리스도께 바치는 일도 나온다는 것을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입는’ 일은 거룩한 미사를 드릴 때마다 제의를 입는 것을 통해 되풀이되어 나타납니다. 우리가 제의를 입는 일은 단순히 외적인 일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직무를 받아들였을 때 “예.”라고 한 대답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이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었고, 사제 서품으로 우리에게 새롭게 준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닌” 내가 되도록 요청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의를 입고 제단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은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다른 분의 몸이 되어’ 있음을 분명히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제의가 변해 온 과정을 보면, 제의는 사제직의 의미를 표현한 심오한 상징입니다.

 

 

그래서 저는 형제 여러분에게 이 성목요일에 제의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사제 직무의 본질을 설명하고 싶습니다. 이 제의는 ‘그리스도를 입는’ 것의 의미, 곧 그리스도로서(in persona Christi) 말하고 행동하는 것의 의미를 정확히 나타냅니다.

 

 

전에는 제의를 입을 때마다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는 사제 직무의 모든 요소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개두포에 관하여 먼저 이야기해 봅시다. 과거에는 이 개두포를 일종의 두건처럼 가장 먼저 머리에 썼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도회에서는 여전히 그렇게 합니다. 이는 합당한 미사 거행을 위한 감각과 생각의 절제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상생활의 근심과 기대로 생각이 이리저리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당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우연히 눈과 귀를 사로잡는 것들에 감각이 이끌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선포된 말씀과 기도가 생각의 길잡이가 될 수 있게 하느님 말씀에 다소곳이 마음을 열고, 교회의 기도 안에서 묵상에 잠겨야 합니다. 우리의 한가운데 와 계신 주님께 마음을 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거행 방식(ars celebrandi)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다면, 우리가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통하여 주님과 친교를 이루도록 사람들을 이끌 수 있습니다.

 

 

장백의와 영대로 표현된 기도문은 모두 같은 것을 지향합니다. 이 기도문들은 지저분하게 누더기를 걸치고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준 가장 좋은 옷을 상기시킵니다.

 

 

그리스도로서 전례에 참여할 때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 얼마나 먼지가 쌓여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옷을 주실 수 있고 우리가 주님의 식탁에서 미사를 거행하고 주님께 봉사하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문은 요한 묵시록의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선발된 144,000명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귀한 것은 그들 자신의 미덕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그들이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묵시 7,14 참조).

 

 

어렸을 때부터 저는 이에 관하여 의문을 품곤 하였습니다. “피에 옷을 빤다면 그것은 절대로 희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답은 이렇습니다. “‘어린양의 피’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더러운 옷을 희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우리의 어두운 영혼을 참되고 밝게 하는 것은 이 사랑입니다. 우리의 모든 어둠에도 ‘주님의 빛’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이 사랑입니다.

 

 

장백의를 입으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도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마음에 되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모든 죄보다 더 큰 것이기에 우리가 주님을 대신하고 주님의 빛을 증언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례 때, 그리고 사제 서품 때 새롭게 우리에게 주신 빛의 옷과 같이, 우리는 하느님 잔치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혼인 예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강론들에서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생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레고리오 교황께서는 그 구절에 대한 루카 전승과 마태오 전승의 차이를 지적하십니다. 루카 전승에서는 종말론적 혼인 잔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반면에, 그가 생각하기에는, 마태오에게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승은 교회 전례와 삶 안에 깃든 이 혼인 잔치를 예고한다고 확신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그리고 사실 오로지 마태오 복음에서만,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게 되고, 그 사람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집니다.

 

 

이 대목에서 그레고리오 교황께서는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는 어떤 종류의 예복을 입어야 했습니까? 교회에 모인 모든 이가 세례의 새 옷을 받았고, 그렇지 않았다면 교회 안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입니까? 이 밖에 어떠한 혼인 예복을 더 갖추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교황께서는 “사랑의 옷”이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임금은 안타깝게도, 자신이 예전에 새 옷, 곧 재생의 흰옷을 주었던 손님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두 겹의 사랑의 자줏빛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자체로 우리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혼인 예복, 곧 사랑을 입지 않고서 어떻게 하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바라겠습니까?” 하고 그레고리오 교황께서는 묻고 계십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의 마음은 어둡습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외적인 그림자는 마음의 눈이 먼 것을 반영하는 것일 따름입니다(「강론」(Hom.), 38,8-13 참조).

 

 

미사 거행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이러한 사랑의 옷을 입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서 모든 적의와 자만심을 없애 주시고 우리가 참으로 사랑의 옷을 입음으로써, 우리가 어둠이 아닌 빛의 사람이 될 수 있게 되기를 간청합시다.

 

 

마지막으로, 또한 제의에 대하여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의를 입을 때 드리는 전통적인 기도에서, 제의는 우리 사제들에게 지워진 주님의 멍에로 여겨집니다. 또한 이 기도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마태 11,29)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께 배우라고 당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말은 무엇보다도 그분에게서 배운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언제나 그분의 학교에 갈 채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에게서 우리는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이 되시어 직접 보여 주신 하느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고자 하셨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의 응답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저에게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순명의 의미를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당신 사랑을 보여 주신, 당신 자신의 고통을 바탕으로 우리가 모든 것을 판단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고통을 바탕으로 우리의 나약함을 가늠하시면서 우리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곧 우리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우리에게 합당한 은사가 무엇인지를 직접 아실 수 있으십니다”(「강론집」(Orationes), 30; 「신학 대담」[Disc. Teol.], 4,6).
 

 

이따금 우리는 예수님께 ‘주님, 당신의 멍에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 멍에는 세상에서는 너무 무겁습니다. 그러나 그때, 모든 것을 감내하신 그분, 곧 순명, 나약함, 고통, 온갖 어둠을 스스로 짊어지신 그분을 바라보면, 이러한 불평이 없어집니다. 그분의 멍에는 그분과 함께하는 사랑의 멍에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사랑할수록, 무겁게 보이는 그분의 멍에는 더욱 가벼워집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더 잘 체험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드립시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1 연옥 맛 1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20.11.02 200
60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20.06.24 206
59 예수님께서 아버지라 부르시는 분 1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20.06.24 86
58 코로나 극복을 위해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 2 (묵주기도 후)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20.05.02 119
57 임금들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20.04.27 56
56 본시오 빌라도와 로마인들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20.04.24 151
55 예수와 바리사이주의 1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20.04.19 126
54 예수와 대사제들 3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20.04.17 127
53 「영적 성경 해석」, 엔조 비앙키, 이연학 옮김 안소근 해설, 분도출판사 2019 1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20.02.16 207
52 "그에게는 내가 모든 것이 되었다" - 「조용한 게 좋아」, 닐 기유메트 성바오로 2019 1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9.07.10 226
51 성모송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9.05.19 455
» "교환의 신비" 2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9.04.26 541
49 「뽐내는 나무」, 루안 로체, 성바오로출판사 1991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9.04.08 94
48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낼까요? - 「새로운 시작, 부활이 왔다!」, 안드레아 슈바르츠, 바오로딸 2019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9.03.20 138
47 빈자리 - 「저 산 너머」 (김수환 추기경 어린 시절 이야기), 정채봉 지음, 리온북스 2019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9.02.27 241
46 할라나 블리츠는 누구인가? - 「연옥맛」, 닐 기유메트 신부 글, 성바오로 출판사 2018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9.02.03 172
45 동방 박사들의 밤 - 「밤에 대한 묵상」, 김진태 신부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9.01.01 219
44 마리아의 기도 2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8.11.29 144
43 마리아의 기도 1 1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8.11.25 209
42 루카 복음서 - 안셀름 그륀 신부 『성경이야기』 1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8.11.25 19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