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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누구인가(양장본 HardCover)

 

p110-120

 

예수 시대에 로마제국의 위세는 극에 달해 있었다. 이 제국이 어떻게 정복하고 조직하고 유지해 냈는지 오늘도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번 상상해 보자. 모로코에서 시리아까지, 영국에서 이집트 북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민족들과 온갖 종교적 형상들을 하나로 다 아우르는 나라를. 그렇게 되는 데에는 몇 해 전에 지중해 일대의 해적들을 소탕해 버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렇게 되면서 지중해에서의 교역이 안전해졌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도처에 도로를 건설하였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동이나 독일에서, 북아프리카나 터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도로들은 어디를 가나 마차를 위해 똑같은 궤도(軌道)를 내었었고 휴식소를 갖추었었다. 전국에 통하는 공통어로는 세계 언어인 그리스말이 쓰였다.

 

행정을 위해서 나라는 주()로 분할되었다. 그중 몇몇은 원로원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다스리기 까다로운 지방에서는 주들이 직접 황제의 통치를 받았다. 유다는 그런 황제 속주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이 사는 이 지방은 소란하고 끊임없이 반란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자기들 지배하의 민족들에게 대체로 지혜로운 정책을 폈다. 어느 만큼은 지방의 고유 권한을 허락하였다. 이들 민족의 종교 신앙과 신전과 종교 습속 등은 로마인들에게 금기 분야였다. 이런 그들의 태도 덕분에 예루살렘은 성시(聖市)로서의 특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유다인들은 소위 디아스포라’, 이산(離散) 지역에서도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땅에서 로마인에 의한 통치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 원인은, 이교도에 대한 멸시 말고도, 그들의 조세(租稅)제도 때문이었다. 누구도 면할 수 없는 인두세(人頭稅)는 어찌나 불공평하던지 인구조사를 할 때마다 반란이 일어나곤 하였다. 경우에 따라 종족과 지방에 과중한 부담을 안겨 주기도 하였다. 예수 시대에는 농부들에게 부과되는 징수액이 너무나 높아서 이집트 같은 데서는 집을 버리고 어둠을 타 야반도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주민 각자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인구조사를 받도록 지시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농을 막으려고 하였다. 요셉이 인구조사를 받기 위해 베들레헴에 아마 집안에서 물려받은 (얼마 안 되는) 땅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로마인들은 징세 업무를 세놓기도 하였다. 이들 세리는 일정액을 갖다 바치고 나머지는 제가 차지하여 부자가 되었다. ‘세리라면 흔히 쓰이는 욕지거리로서 성서에 보면 언제나 죄인이라는 말과 짝지어 나오곤 한다. 그러니 예수가 세리 한 사람을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우리로서는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로마인들에게는 물론 군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들은 사실 아주 적은 수의 병사들을 가지고 제국을 통치하였다. (군단 단위로 조직된 병력은 대략 오스트리아 국군 규모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에게는 그 외에도 해당 지역마다 지원군이 있었다. 유다인 지역에서는 지원군으로 사마리아인들을 선호하였다. 이들은 유다인들의 앙숙이었으므로 믿음직하였다. 이들 부대원들은 유다인 게릴라와 무자비한 유격전을 벌이곤 하였는데, 게릴라들은 오늘날의 근동 테러리스트와 닮은 사고방식으로 행동하였다. 그런 도당들이 거듭 출현하면서 한 두목이 자기를 메시아로 내세우는 전투는 시작되었다. 이런 도당들의 이름은 여러 가지였다. 그중 하나는 열혈당이었는데, 사도들 중 한 사람은 열혈당원 시몬이라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제자들이 이들 자유 전사들의 사상에 그리 멀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도당은 칼잡이들이라 하였다. 예루살렘 박물관에 가 보면 예수 시대의 단도 한 자루가 보존되어 있는데, 그 칼날에 아람어로 맛있게 드시오라고 새겨져 있다.

 

이런 배경 설명이 수난사기에 왜 중요한가.

 

그것은 우리가 가시관을 씌우기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이 병정들은 마침내 자기들이 미워하던 유다인 폭도들의 한 배후 조종자 겸 두목을 꼼짝없이 붙잡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끔찍한 장면을 연출했던 것이다. 승리한 지휘관으로 그를 조롱한 것이다. 그러면서 로마의 승전 장군들이 하듯이 지휘관의 겉옷을 입히고 지휘봉을 쥐여 주고 월계관을, 가시관을, 머리에 씌운 것이다. 가시덤불은 당시 불쏘시개로 얼마든지 널려 있어, (베드로가 대사제 관저 앞에서 쪼였다는) 병사들의 밤 모닥불에도 흔히 쓰였다.

 

로마군의 군단은 6000명의 병사로 보병대는 600명으로, 백인조는 200명으로 편성되었다. 보초는 (네 차례의 야번(夜番)을 위해) 네 사람씩 네 팀으로 짜였으며 사형조도 규모가 비슷하였다. 부대의 사령관은 십자가 밑에 써 있었듯이, 백인대장이었다. 보병대의 지휘는 한 호민관(護民官)이 하였다.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는 한 총독 장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의 표현을 빌린다면 근동 최고사령부인 셈이다. 그는 또한 본시오 빌라도의 직접 상관이었다. 로마의 지방 태수가 묵던 해변 카이사리아는 강력한 수비대가 지켰다. 팔레스티나에는 한 군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카이사리아에서는 코르넬리오 중대장이 이 부대에 속해 있었다. 그는 베드로가 처음으로 세례를 베푼 이교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예수 시대 수백 년 이후 그 군대가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데 한 몫을 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서기 52년 팔레스티나에 있던 로마 군단이 라인강변에 있는 쾰른으로 이동하였다. (코르넬리오도 혹시 거기 있었을까.) 6000명이 지중해를 건너 마르세유로 갔고 거기서부터는 도보로 리옹과 트리어를 거쳐 콜로니아 아그린피나, 즉 쾰른으로 행군하였다.

 

그건 그렇고 유다인들은 병역에서 면제되었다. 그들은 군인 신분으로 상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점령은 역시 부담이었다. 로마인들은 어떤 나라를 처벌하려 할 때면 한 군단을 그리로 이동하였다. 부대원들은 그 땅에서 먹고살아야 했고 그러자니 그만큼 약탈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값진 물건들을 곧잘 묻어 두었고, 그 덕분에 오늘의 고고학자들이 기뻐한다.

 

이제 우리가 성서 이외에 본시오 빌라도에 관해서 알아본다면 그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 그의 이름은 신경에도 들어 있는데 거기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이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임을 보여준다.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가.

 

본시오 빌라도는 하나의 로마인 기사’, 한 하위 귀족 출신이었다. 그의 보호자는 저 무소위의 세야누스Sejanus, 로마의 숨은 세도가로서 황실 친위대의 수장이며 소문난 유다인 혐오자였다. 세야누는 본시오가 유다인 나라에서 어련히 냉혹하게 통치하기를 기대했다. 세야누스가 그에게 누구나 탐내는 ‘amicus Caesaris’, ‘황제의 친구라는 칭호를 얻어 준 것으로 미루어 본시오가 그의 이런 기대에 부응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고발한 자들이 본시오에게 외쳐 댄 소리를 상기하자. “그 사람을 풀어 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이 협박이 본시오 빌라도로 하여금 나머지를 하게 했다.)

 

수난사기를 살펴보면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본시오 빌라도가 최고의회를 상대로 몇 차례씩이나 손해 보았다는 사실이다.

1. 로마인들에게는 예루살렘에 어떤 신상이나 황제의 상징을 세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빌라도는 상관하지 않고 처음 입성했을 때 병정들이 창 끝에 부적 삼아 자그마한 신상을 달도록 놓아두었는가 하면 종교적 의미를 띤 로마 군기를 성전이 바라보이는 안토니아 요새(성전의 서북 모퉁이에서 성전 일대를 내려다보는 성으로, 로마 총독 시대에는 감시 초소로 쓰임) 앞에 도발적으로 꽂아 세우게 하였다. 유다인들은 크게 흥분하여 카이사리아로 내려가 총독 관저 앞에서 여러 날에 걸쳐 시위를 벌였다. 본시오는 참다 못해 자기 병사들로 하여금 항의하는 군중을 포위하게 하고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유다인들은 자기들이 차라리 죽임을 당하면 당했지 성시(聖市)의 독성(瀆聖)에 동의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본시오는 군기와 이교적인 부적을 제거하도록 하였다.

 

2. 또 한번은 본시오가 황제의 이름이 금으로 새겨진 방패들을 내걸게 하면서 그 앞에서 향을 피우게 하였다. 최고의회가 반대하였고 로마까지 항의하러 가서는 그 방패들을 떼어 내지 않을 수 없게끔 하였다.

 

3. 본시오는 예루살렘에 배수관을 설치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유다인들이 수도관 비용을 내야 한다고 생각하여 성전 재화 창고에서 돈을 꺼내게 했다. 또다시 로마에까지 항의가 이러렀고 로마는 그 돈을 다시 집어 넣어야 한다고 명령했다.

 

빌라도와 최고의회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 이런 사정들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수난사기에서 만나는 빌라도는 이미 여러 차례 패했었다. 그는 자기의 적수들이 매우 위험하다는 걸 안다. 예수도 그런 줄 알고 그에게는 덜한 책임을 지운다.

 

본시오의 아내는 수난사기에서도 말해 주듯이 예수와 은근히 동조하는 여인이었다. 이것이 본시오에게는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본시오는 심문하기 전부터 나자렛 출신 장인(匠人) 예수가 정치적으로는 전혀 무고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모든 강국들이 그렇듯이 스페쿨라토레스Speculatores라는 매우 잘 조직된 정보부를 가지고 있었다. 고대의 CIA라 할까. 그렇기에 예수는 지적할 수 있었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나를 위해 싸웠을 것이다.” 그건 이런 뜻이다. “그렇다면 어제 저녁 올리브동산에서 전혀 달랐을 것이라는 것을 당신도 잘 알지 않느냐...”

 

본시오가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별로 알지 못한다. 그는 로마의 오랜 동맹이었던 사마리아인들의 유혈 탄압으로 자기 권한의 도를 넘었던 것 같다. 이들은 안티오키아에 있는 총독 장군에게 항의했고 그는 빌라도를 해임하였다. 그리고 그는 로마 황제 법정에 출두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티베리우스 황제는 이미 죽었고, 그 후임인 칼리굴라는 본시오를 접견조차 하지 않을 채 그를 유배하였다. 이 사안이 사나운 죽음을 맞은 유다인들의 원수들만 거명되는 문헌에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빌라도 역시 그렇게 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빌라도를 만나면서 예수는 냉혹한 정치적 계산이라는 것과 대면한다. 당초 빌라도가 예수의 편을 들었던 것은 유다인 대표들에 대한 반감에서였지 정의의 기본 원칙이 그 동기는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는 세계 역사와 인간 운명에 있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에 대한 응답은 우리로서는 헤아릴 수조차 없이 깊은 사랑에 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저 극도의 굴욕에서 그 가장 감명 깊은 꽃으로 피어난다.

 

 

-라인홀트 슈테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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