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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 맛

 

설을 맞이하면서 닐 기유메트 신부님의 이야기 하나를 나눕니다.

신부님께서는 늘 이야기를 통해 복음과 신앙의 신비를 밝혀 주십니다.

(밑의 이야기가 실화가 아닌 이야기임을, 신앙 성숙을 목표로 지어진 이야기임을 말씀드립니다).

 

도그마-3이라는 행성에서 방금 또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발견되었다. 이름은 할라나 블리츠라는 중년 여성으로 병원 연구실에서 근무하는 전문가였다. 그녀는 브래드 로공이라는 정신 위생청장에게 벌써 두 번씩이나 심문을 받았다. 그에 앞서 그는 부관 나르팀 블러가 진행하는 심리를 지켜보면서 나름대로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이제 그녀에게는 그녀의 미신을 철회할 수 있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기회가 주어질 참이었다. 만약 이번에도 고집을 부린다면 그 벌로 대뇌 제거 수술을 실시할 것이다. 미신에 젖어 있는 정신을 근절시키기 위해 행하는 이 대뇌 제거 수술은 우리가 다 알다시피 21세기에 이미 그 완벽한 기술 수준에 도달했다. 그 당시 대뇌 피질 연구원들은 전두엽의 특정 부분이 종교적 신념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아냈다. 이는 언어나 논리적 사고, 예술적 표현 등을 담당하는 중추와는 엄연히 구별된다. 대뇌 제거 수술은 전두엽의 그 특정 부분을 떼어 내 버림으로써 종교적 사고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심문은 정신 위생청의 공식 법정에서 행해졌다. 법정의 서두 연설이 끝나자, 브래드 로공은 피고인의 그릇된 신앙을 뿌리 뽑고자 마지막으로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는 열띤 음성으로 호소했다.

 

이봐요, 할라나. 당신은 총명하고 많이 배운 데다 분별력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높은 여자에요. 전문 분야에 관한 과학 기술의 발전상을 최근 것까지 정통하고 있는 당신이 그리스도교라는 그 미개한 미신을 믿는단 말이오?”

 

그녀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침착하고 기품 있게 증인석에 서서 단호하게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정신 위생청장님이 저의 신앙을 함께 나누지 못한다는 사실에 애석할 따름입니다. 청장님도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훨씬 더 행복하실 텐데요.”

 

그녀의 대꾸어 브래드 청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스도인들을 심판할 때마다 그들의 한결같은 고집스러움 때문에 그는 극도로 짜증이 나곤 했다.

 

끝까지 그렇게 어리석게 굴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겠죠? 그런 병적인 생각을 계속하게 하는 일부 대뇌를 제거해 버릴 것이오. 단 한 번의 레이저 광선 투과로 만사가 깨긋해져요. 당신 자신이 한때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거요. 당신은 어떠한 이데올로기에도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되고 개성을 말살되겠죠. 두렵지 않소?”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는 눈치였다. 자신의 정신세계가 그렇게 무참히 짓밟히고 절단된다는 생각에 움찔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제 사고능력을 없앨 수는 있겠죠. 하지만 청장님, 믿음은 두뇌의 소산이 아니라 마음의 응답이랍니다. 인격체로서 제 밑바탕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인일 겁니다. 제가 머릿속으로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제가 공식적으로 종교에 관한 한 죽은 사람이 되더라도 이것만은 알아 두세요. 정부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뇌사시킬 때마다 그 결과 열 명의 새 그리스도인이 탄생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청장님, 우리가 사는 행성뿐 아니라 은하계의 다른 여러 행성에도 그리스도인은 많습니다(아무리 뿌리 뽑으려 해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암흑시대를 견뎌 낼 것입니다.”

 

이렇듯 심문은 계속되었다.

 

청장의 젊은 부관 나르팀 블러는 소송 절차 내내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는 신념이 굳고 동시에 생기 넘치는 피고의 됨됨이 매료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과학적 지식이 그렇게 탄탄한 여자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할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품은 채 이 일에 임했다. 어느 누구보다도 앞선 현대 여성이 그런 쓰레기더미 같은 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가 생각하기에 명백한 모순이었다.

 

그는 의혹을 떨치지 못해 그녀가 피고인으로 체포되고 소송이 제기되는 동안 개인 소지품을 샅샅이 조사해 보았다.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들 중에 4복음서란 소책자가 눈에 띄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정신 작용을 파악해 볼 요량으로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인도 정신을 갖고 있다면 말이다. 이는 토론 여지가 많은 가설이다.

 

어쨌든 그는 시간이 없어서 그 책을 절반 정도밖에 읽지 못했는데,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마저 읽으리라 마음먹었다. 4복음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이면서도 왠지 넋을 잃게 하는 묘한 구석이 있는 책이었던 것이다.

 

결국 마지막 심문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났다. 할라나 블리츠는 결단코 신앙을 저버리려 들지 않았으므로 정신 위생청 직원들의 감시를 받으며 대뇌 제거 수술 의료 센터로 끌려갔다. 그녀를 심문하는 것이 그날 처리해야 할 소송 사건의 전부였으므로 청장과 그의 부관은 금세 텅 비어 버린 법정을 나와 각자의 사무실로 갈 참이었다. 그런데 청장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데 대해 뜻밖에도 무천 상심하는 눈치였다. 그는 너무나도 낙심하여 자기 사무실로 가기엔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 부관의 사무실로 따라 들어갔다. 잠깐 잡담이라도 나누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르팀은 그의 상관이 주기적으로 그러한 무력감에 빠져든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즉시 서랍에서 위스키 한 병을 꺼내 청장에게 한 잔 권했다.

 

그걸 마시면 기운이 좀 나실 겁니다.”

 

고맙네, 정말 마시지 않고는 못 배기겠어.”

 

부관의 책상 앞에 있는 손님용 의자에 앉으며 그가 말했다. 그는 잠시 말없이 위스키를 조금씩 마시면서, 한참 동안 아침에 법정에서 있었던 소송 절차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르팀, 자네도 알겠지만, 때때로 나는 우리가 저 그리스도인들을 모조리 제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 그들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 곁에 붙어 다닐 거란 말일세.”

 

그는 말을 멈추었다. 의기소침한 마음을 전하기에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최후의 그리스도인이란 결코 없을 거란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니까! 무슨 뜻인지 알겠어?”

 

나르팀은 동정 어린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알다마다겠어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저는 가끔이 아니라 늘 그렇게 생각했었죠. 청장님을 실망시켜 드리고 싶진 않지만, 우리가 아무리 그들의 존재를 없애고자 노력한 해도 절대 최후의 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이 설 정도입니다. 박멸하겠다고 화학 약품을 쓰면 도리어 돌연변이를 일으켜 더욱 강력한 균주가 되는 페스트균 같다니까요. 저들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짓밟을수록 더욱 무성하게 자라나는 잡초 같아요.”

 

그래, 맞아.”

 

브래드 청장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체념의 빛이 역력했다.

 

저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머무르리라 생각한단 말이지? 절대 최후의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다, 그 말이지?”

 

나르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명백한 그 사실을 상관은 이제야 비로소 어쩔 수 없이 인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청장이 나가자 나르팀은 사무실의 문을 잠그고 나서 할라나의 소지품에서 나왔던 복음서를 꺼내 들고 계속해서 읽기 시작하였다.

 

이따금 그는 숨을 죽이며 믿을 수 없어!” 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동시에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 뭉클해 옴을 느꼈다. 드디어 마지막 페이지까지 매우 세심하게 다 읽고 난 그는 책장을 덮고 오래도록 생각에 잠긴 채 몇 번씩 혼잣말을 했다.

 

나자렛 예수라, 굉장한 사람이야!”

 

결국 그는 퇴근하고 집에 가려고 일어서면서 자신의 사고 체계가 갑작스레 대대적으로 변화하였음을 느꼈다. 이제 왜 그리스도인이 멸종되지 않고 남아 있는지를 궁금하게 여기지 않게 된 것이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이 어째서 그렇게 몇 명밖에 안 되는지 궁금해졌다.

 

- 닐 기유메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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