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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된 책이라 오랜 만에 읽으면서 올려봅니다. 사순의 막바지 은혜로운 시간 되시길

 

 

그는 숲속에서 가장 건강하고 늘씬한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교만했어요. 너무나도 말이예요.

  “나는 이 숲속에서 가장 대단한 나무야.”

그는 늘 자기를 뽐내곤 했습니다.

  “나는 로마 병사처럼 건강하고 늘씬해. 그뿐이 아니지. 나는 백부장처럼 용감하기도 해. .”

그가 이렇게 끊임없이 자랑하는 바람에 주위의 나무들은 모두 싫증이 나고 말았지요. 그래서 그에게 왕의 뜻을 가진 렉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치 자기가 숲속의 왕인 것처럼 행세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의 죄명패 INRI 중의 R은 왕을 뜻하는 REX렉스 입니다)

 

 

 

해가 떠오르는 새벽녘이나 해가 지는 황혼녘이 되면, 숲속의 모든 나무들은 자기들을 만들어 주신 하느님께 손을 높이 들어 감사하고 또 그분을 찬미했습니다.

   그러나 렉스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자기의 싱싱한 초록 이파리들이 아침 햇살에 반짝거리는 것을 바라본다든지, 초저녁 산들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감탄하며 바라보는 데만도 너무나 바빴기 때문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 병사 몇 사람이 말을 타고 숲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숲에 서 있는 나무를 하나하나 자세하게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나무 저 나무를 둘러보며 고개를 내젓곤 하던 그들이 이윽고 렉스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렉스는 고개를 번쩍 들고 몸을 곧게 펴고는 가지를 힘차게 흔들어댔지요. 그러자 대장이 말에서 내려 렉스의 주위를 돌며 렉스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 나무는 왕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겠는걸.”

 

 

 

  “왕이라니?”

렉스는 깜짝 놀라 중얼거렸습니다.

  “어떤 왕을 말하는 거지? 그리고 저 사람들이 왜 웃는 걸까?”

 

 

 

다른 군인들도 말에서 내려 렉스의 주위를 돌며 렉스의 키도 재어 보고, 가슴둘레도 재고 또 강한 피부도 만져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맞아. 저 사람들은 이 숲속에서 내가 가장 훌륭한 나무라고 생간한 게 틀림없어. 그 왕에게 아주 잘 어울릴 정도로 말이야.”

 렉스는 큰소리롤 말했습니다.

  “다른 나무들도 이 사실에 대해 좀 알아야 할 텐데.”

 렉스는 거만하게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 왕은 로마에 갔다 오는 긴 여행길에, 나의 이 멋진 가지로 드리워진 그늘 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싶어 할거야.”

   “아니면 자기 정원에 나를 심어 놓고 모든 신하들에게 자랑을 하려고 하든지. 그러면 그 신하들은 넋을 잃고 감탄을 하겠지?”

 

 

 

어느 새, 렉스는 자신이 궁전 뜰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가지 끝에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깃털을 가진 새들이 집을 짓고 사는 것도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했지요. 렉스는 흥분이 되었습니다. 왕의 나무가 된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떨리는 듯했습니다.

 

 

 

!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정작 렉스가 몸을 떨게 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병사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요? 렉스는 병사들이 자기 몸에 도끼를 휘둘러 대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익 쿵! -익 쿵!

 

 

 

! 저런! 그들은 렉스를 도끼로 찍어대는 것이었습니다. 렉스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안 돼! 내게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내가 누군지 알기는 하는거야? 나는 렉스, 이 숲속의 왕이란 말이야! 지금 당장 멈춰!”

 

 

 

렉스가 몸부림을 쳤지만 이미 늦어 버렸습니다.

  천둥치듯 !” 하는 소리와 함께 한숨 소리를 내면서, 렉스는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의 멋진 가지들은 이제 다시는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리며 뽐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렉스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던 뿌리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이 세상에 뿌리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나무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렉스도 사슬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병사들은 렉스의 몸뚱아리를 둘로 나눈 다음, 나란히 눕혔습니다. 그리고 잔가지와 나뭇잎들을 모두 쳐 내고 껍질도 벗겨 냈습니다. 자기가 알몸뚱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렉스는 몹시도 화가 났습니다. “아니, 감히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병사들은 렉스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뚱아리 두 부분을 사슬로 묶어서 말에 매었습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까지 질질 끌고 갔습니다. 가는 동안 렉스의 몸뚱아리는 험한 바위에 수없이 부딪히기도 하고, 강물에 곤두박칠을 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어느 뜰에 멈추어 섰습니다.

 

 

 

일꾼들이 오더니 렉스 몸에 홈을 파고 그것을 서로 짜 맞춘 다음, 단단히 고정시켰습니다.

   “좋아 이제 내 몸이 다시 하나가 되기는 하였구나. 이렇게 된 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이지.”

렉스는 이렇게 생각하며 조금 안심을 했습니다.

  렉스는 태양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태양은 하늘 높이 솟아 있었습니다. 렉스는 지금이 늦은 아침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 안뜰 벽에 내 그림자가 비치는구나. , 이것 보게! 내 모양이 아주 달라졌네. 사람들이 나를 어떤 의미 있는 모양으로 만들었어. 왕에게 놀라운 선물이 될 게 틀림없어.”

   렉스는 매우 특별한 일이 일어나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감각으로 그것을 알 수가 있었지요. 문이 열려 있는 틈으로 길이 보이는데, 길 양쪽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주욱 서 있었습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사건임에 틀림없어. 그리고 나는 그 사건의 일부가 되는 거야. 다른 나무들이 이 광경을 보지 못하는 것이 참 애석하군 그래. 틀림없이 나를 부러워할 텐데 말야.”

   이제 렉스는 자랑스러움에 겨워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습니다. 그는 왕이 언제 올까, 조바심 속에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갑자기 안뜰이 시끌시끌해졌습니다. 그러더니 웬 길고 날카로운 가시로 만들어진 관을 머리에 쓴 사람이 병사들에 의해 난폭하게 떠밀려 뜰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새빨간 피가 그 사람의 얼굴 위로 흘러내리고, 긴 머리카락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그 사람의 온몸은 매맞은 자욱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렉스는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일을 저질렀기에 이렇게까지 두들겨 맞고 피를 흘리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이 사람은 몹시 지쳤나보군 그래.”

렉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상한 걸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얼굴에는 당당한 기품이 엿보였는데, 마치 왕처럼 말이야. 이 사람이 병사들이 말하던 그 왕이 아닐까? 아아, 그렇지 않아! 그럴 리가 없어. , 그럴 리가 없지. 감히 누가 왕을 이렇게 대하겠어?”

 

 

 

병사들은 그 사람을 렉스에게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더니 그들은 렉스의 몸뚱아리를 놓는 것이었습니다. 가시관을 쓴 사나이의 등 위에 올려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등은 피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렉스는 자신이 들어 올려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부드럽게 그리고 아주 사랑스럽게 자기 몸을 져 올리는.

   그들은 멀리 보이는 언덕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렉스가 보기에는 꽤나 먼 거리인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 사람이 렉스는 지고 나가는 길에, 사람들은 그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반응은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난 듯이 소리를 질렀고, 어떤 사람은 손가락질을 하며 웃어댔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저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저 침묵 속에.

 

 

 

그 사람은 병사들 앞에서 세 번이나 넘어졌습니다. 마침내 세 번째 넘어졌을 때, 병사들은 군중들 틈에서 어떤 사람을 붙들고 와서는 렉스를 대신 지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제 거의 다 왔는데.”

렉스는 투덜거렸습니다.

   “내가 살던 숲에서 예루살렘까지 올 때는 말 두 마리가 나를 끌고 왔었잖아? 그런데 지금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길을 이 사람 혼자서 지고 가라고 하다니. 그러니 이렇게 쓰러질 수밖에.”

 

 

 

드디어 산꼭대기에 다다랐습니다. 산꼭대기에는 렉스와 똑같은 모양을 한 나무가 둘이나 서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여기에 내려놓아라.”

어느 병사가 소리쳤습니다. 그리고는 주위의 병사들을 다시 돌아보며 다시 명령했습니다.

   “그것은 가운데에 세워라.”

   “십자가라고?”

렉스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나를 가지고 만든 게 십자가였구나. 이것은 참 신기한 예식이야. 어쨌든 나는 한가운데 서게 된다. 그것은 내가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길 양쪽에 줄지어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언덕 위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병사들이 가시관을 쓴 사람의 옷을 찢기 시작하자, 구경을 하던 사람들은 그 사람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렉스는 깜짝 놀랐습니다. 병사들을 만난 이후 깜짝 놀랄 일을 많이도 겪었지만, 이렇게까지 놀라 보긴 처음입니다.

   “이건 그다지 멋진 의식이 아니야. 이 의식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걸.”

 

 

 

가시관을 쓴 사람이 렉스 곁에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런 눈빛을 본 적이 없어. 매우 온유하고 친절해 보여. 그런데 너무너무 슬퍼 보이는구나.”

   그러자 렉스는 이 사람에 의해서 자기가 옮겨질 때 기분이 무척 좋았다는 사실이 생각났습니다. 병사들에 의해서 그렇게 난폭한 대접을 받고 지쳐 있던 자신의 몸이 그 힘센 어깨에 의해서 들어올려졌을 때, 그는 마치도 숲속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 같은 아늑하고 따스한 느낌을 받았었던 것입니다.

 

 

 

  “참 이상도 하다.”

렉스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병사들이 자기에게 한 짓에 대해 화가 나지도 않는 모양이야.”

 

 

 

그때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습니다.

  “이 사람들이 지금 무얼 하는 거지?”

갑자기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의 손과 발을 렉스의 몸뚱아리에 대고 못으로 박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렉스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두무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따뜻한 피가 그 사람의 상처로부터 흘러 내려 렉스의 몸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렉스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병사들은 나무판에 어떤 글씨를 써서 그 사람의 머리 위쪽에 못질을 하여 붙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렉스를 똑바로 세운 다음 땅에 단단히 박았습니다.

 

 

 

렉스는 오른쪽에 서 있던 나무에게 조그마한 소리로 물어 보았습니다.

  “그 나무판에 무어라고 써 있지?”

그 나무는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쓰여 있어.”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

 

 

 

오른쪽에 서 있는 나무의 대답을 듣고 렉스는 기절할 정도로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렉스는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더 큰소리를 내며 떠들어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질러대고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이라면, 그 십자가 위에서 내려와 보시지.”

  “다른 사람들은 살릴 수 있으면서, 왜 자신은 살리지 못하는 거요?”

  “당신이 왕이라고? 그렇다면 당신의 군대는 어디 있소?”

그들은 점점 더 화가 난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당신의 아버지는 지금 어디 있소?”

  “하느님이라니?”

너무도 놀란 렉스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자기가 왕이라면 사람들이 자신을 이렇게 대할 때까지 내버려 둘 것 같애? 나는 그가 몸서리치는 걸 느낄 수가 있어. 슬픔과 아픔을 견디다 못해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키고, 고통이 심해질 때마다 헐떡거리면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어. 그뿐인가? 그 몸에서 나온 피가 내 몸에 스며들고 있어.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이란 말이야? 하느님은 영혼으로 되어 있어. 그렇지 않아?”

 

 

 

렉스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소리로 해서 렉스의 몸은 위아래로 흔들거렸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간청하는 목소리는 부드러웠습니다. 렉스는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다니요? 그들을 용서하라구요? 당신은 고통 때문에 정신이 돌았나 보군요. 이런 사람들을 용서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나무들조차 그렇다구요. 이렇게 잔인한 사람들을 용서해 준다는 것은 말도 안돼요. 모든 생물은 적을 미워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어요. 더군다나 그들이 우리를 이렇게 두들겨 패서 죽을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을 때는요.”

 

 

 

렉스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어쨌거나 십자가 위에 있는 이 사람이 화를 낸다고 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니까요.

   “들어보세요. 이런 사람들을 용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구요.”

렉스는 다시 말했습니다.

  “아무도, 물론 하느님은.”

갑자기 렉스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도 자신이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렉스는 더듬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리고 아들이란 소리를 들었어. 이 사람이, 정말로 하느님일까? 이 사람이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렉스의 가슴은 놀라움으로 벅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그가 나를 만졌어. 나를 업어주었고, 나에게 못 박혀 매달렸어. 왜 하느님께서 나와 그토록 가까이 계시길 원하셨을까?”

 

 

 

렉스는 슬픈 목소리로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정말이지 저는그다지 훌륭한 나무가 아니었어요. 좀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숲속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나무였는지도 몰라요. 거기에는 당신과 가까이할 자격이 있는 나무들이 많아요. 그런데 예수님, 왜 저를 뽑으셨어요? 그렇게 훌륭하고 충성스러운 나무들을 두고왜 저를?”

렉스는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진하고 끈끈한 수액을 흘리면서 말입니다.

   “죄송해요. 아버지, 당신께서는 저를 만들어 내신 것을 후회하고 계실 거예요. 정말, 정말 죄송해요.”

   렉스의 몸 전체에서 수액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 수액은 예수님의 상처에서 나온 피와 한데 엉겨 땅을 덮었습니다.

   렉스는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멀리에서 들려 왔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의 몸이 무겁게 축 늘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북받치는 슬픔이 렉스의 온몸을 강하게 흔들었습니다.

 

 

 

아직은 한참 오후였습니다. 검은 구름이 무겁게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구름은 태양을 가리더니 주위를 온통 캄캄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천둥이 화난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땅을 뒤흔들었습니다. 번갯불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내려와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그것은 마치 죄지은 사람을 단죄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초조하고 불안해졌습니다. 그들은 하늘과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고, 그러다가 예수님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한 사람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습니다.

   렉스는 사람들이 머리에 옷자락을 덮어쓰고 도망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습은 물건을 훔치다 들켜 달아나는 도둑과도 비슷하게 보였습니다. 사나운 바람이 등을 내리쳤고, 억수같이 퍼붓는 피가 옷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마침내, 그 많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때 렉스는 십자가 아래 조용하게 서 있는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의 어머니였고,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의 친구였습니다.

렉스는 자기 몸을 아주 조심스럽게 흔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하고 속삭이듯 불렀습니다. 위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그는 조금 더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여전히 십자가 위의 예수님에게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니,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렉스의 목소리에는 불안감이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일어나세요! 예수님, 일어나세요!”

그래도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렉스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가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렉스는 두려움에 몸부림을 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래도 십자가 위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죄송해요, 예수님! 제발 저도 좀 용서해 주세요. 죽지 마세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렉스는 이제 절망감에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이시잖아요! 하느님이 죽으시면 어떡해요!”

 

 

 

죽어가는 나무에 대해 옛날부터 전호 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무가 죽어 가면서 자기가 그동안 잘못한 일에 대해서 뉘우치고 좀더 잘 살았을 걸 하고 바란다면, 하느님께서는 그 나무의 씨에서 새로운 싹이 나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

   렉스는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 아주 교만하고 은혜를 몰랐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렉스가 지금 진실하게 뉘우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들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만 지금 예수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허탈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내 말을 들을 수가 없으셔. 나는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거야.”

하지만 렉스는 오늘 자기가 뽑힌 것이 고맙고 영광스럽게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알아주셨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그렇게 가까이 계셔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싶어.”

그는 조용히 기도를 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마음으로 팔을 높이 들어올리고 싶어. , 그렇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구나! 나에게는 가지가 남아 있지 않잖아. 나는 발가벗겨진 채로 홀로 남겨졌어. 이제 너무 늦었어.”

   렉스는 매우 창백했습니다. 정말 너무 늦은 것입니다.

한 병사가 기다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상처로부터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신 것입니다!

 

 

 

렉스는 계속해서 죽어 가는 나무에 대한 전설을 생각했습니다. 나무는 죽기 전에 음악 소리를 듣는데, 그 음악이 무척 슬프고 우울하면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없을 것이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천사들의 노래 소리처럼 들리면, 이전보다 훨씬 훌륭한 나무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하는 소리를 들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가 그분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내가 교만했던 것을 얼마나 뉘우치는지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무얼 필요로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어. 나만을 위해서 모든 걸 원했지. 나는 내가 가장 훌륭한 나무라고 생각했어. 마치 내 스스로의 힘으로 태어나고 자란 것처럼 말이야.”

   “나를 만들어 주신 하느님께 일찍 감사를 드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 주위에 있는 나무들을 사랑했더라면, 예수님께 조금만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그렇지만 이제 예수님은 가시고 안 계십니다.

   그분의 친구들이 와서 시신을 가지고 어디론가 가버린 것입니다. 나무들은 그 뒷모습을 지켜 보았습니다.

   바람이 찾아와 렉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친구들은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을 빌려서 예수님을 거기에 묻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안에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병사들이 입구에 지키고 있다고 얘기도 해주었습니다.

   “참 어리석기도 하지.”

렉스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죽은 사람이 어디로 간단 말이야? 자신의 죽음을 위한 음악을 기다리며 서 있는 동안, 렉스의 몸에서는 수액이 끊임없이 흘러 나와 땅을 적시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얼마나 잔인한 대접을 받았는지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새 렉스는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예수님을 잘 돌봐 달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그토록 심한 고통을 받으면서도, 당신에게 고통을 주는 그 사람들을 용서하였던 것입니다.

   렉스도 더 이상 원망할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렉스는 자신에게 속삭였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노력할거야.”

 

 

 

안식일 다음 날 동이 틀 무렵이었습니다. 렉스는 너무도 피곤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그를 위하여 세워 놓으신 계획이라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그를 만들어 주신 분의 손에 달린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어디서인가 음악이 들리는 것 같아 렉스는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리는 너무도 조용하였기 때문에,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틀 전, 그렇게 무섭게 불던 폭풍도 가라앉았습니다. 렉스는 눈을 겨우 뜨고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새벽녘이었습니다.

   바람의 목소리를 아주 작아서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숲속에서 불던 바람과는 다른 매우 따스하고 부드러운 바람이었습니다.

 

 

 

어떤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가느다랗고 높은 피리 소리처럼.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면서, 점점 즐겁고 경쾌해졌습니다.

   마지막 수액이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렉스는 아름다운 음악에 사로잡혀서, 자가기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몇 사람이 부는 것 같던 피리 소리가, 수천 명의 합주 소리로 변했습니다. 그 소리들은 렉스의 주위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들은 알렐루야를 즐겁게 부르며 렉스의 주위를 둘러쌌습니다.

토끼와 강아지, 그리고 참새가 렉스를 지켜보며 렉스의 마지막 수액이 땅위에 떨어져 사라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렉스는 죽은 것입니다.

 

 

 

새싹을 처음 본 것은 아주 작은 다람쥐였습니다. 그 새싹은 렉스의 수액이 하느님의 피와 엉겨 섞여진 곳에서 솟아 자란 것입니다. 작은 가지와 부드러운 잎들이 새로운 삶의 선물을 받고, 기쁨에 겨워 해를 향해 힘차게 팔을 들어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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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예수와 바리사이주의 1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20.04.19 126
54 예수와 대사제들 3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20.04.17 127
53 「영적 성경 해석」, 엔조 비앙키, 이연학 옮김 안소근 해설, 분도출판사 2019 1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20.02.16 207
52 "그에게는 내가 모든 것이 되었다" - 「조용한 게 좋아」, 닐 기유메트 성바오로 2019 1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9.07.10 226
51 성모송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9.05.19 455
50 "교환의 신비" 2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9.04.26 541
» 「뽐내는 나무」, 루안 로체, 성바오로출판사 1991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9.04.08 94
48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낼까요? - 「새로운 시작, 부활이 왔다!」, 안드레아 슈바르츠, 바오로딸 2019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9.03.20 138
47 빈자리 - 「저 산 너머」 (김수환 추기경 어린 시절 이야기), 정채봉 지음, 리온북스 2019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9.02.27 241
46 할라나 블리츠는 누구인가? - 「연옥맛」, 닐 기유메트 신부 글, 성바오로 출판사 2018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9.02.03 172
45 동방 박사들의 밤 - 「밤에 대한 묵상」, 김진태 신부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9.01.01 219
44 마리아의 기도 2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8.11.29 144
43 마리아의 기도 1 1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8.11.25 209
42 루카 복음서 - 안셀름 그륀 신부 『성경이야기』 1 김아우구스티노신부 2018.11.25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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