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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9 11:02

예수와 바리사이주의

조회 수 126 추천 수 2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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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누구인가(양장본 HardCover)

 

p101-109

 

내가 이제 예수의 죽음에 가담한 둘째 무리를 다루면서 바리사이들이라고 하기보다 의도적으로 바리사이주의라는 표현을 쓰기로 했다. 그것은 주어진 실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식별이다. 원래 바리사이들, 소위 페리슈팀’, “갈라선 자들이란 헬레니즘적이고 이교적인 세계 한가운데서 유다교계를 지켜 내는 대결과 수호에 있어 지대한 공적을 쌓은 수천 명에 불과한 무리였다.

 

사두가이들과는 달리 바리사이들은 진지하게 종교적이었다. 그들 중 율법학자들은 유식하였고 그중에는 랍비 힐렐이라는 바오로의 스승이로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저 유명한 가말리엘 같은 이도 있었다. 그들의 가르침의 많은 부분은 계시 진리와 온전히 합치하고 높은 도덕성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나 그렇듯이 여기서도 변질과 왜곡과 비좁은 소견이 초래하는 한심스러운 헛길과 오판이 도사리고 있었다. 예수는 경우에 따라 유다적 신심의 그러한 왜곡된 입장에 심하게 맞서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이러한 물락상을 모든 바리사이들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 ‘바리사이라는 말을 욕으로 쓰지는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복음서에서는 어째서 예수와 앞서 본 유형의 바리사이주의와의 대결이 그토록 큰 몫을 차지한 것일까. 복음이 집필되었을 무렵에는 바리사이주의가 신생 교회에는 별 문제가 안 되었다. 그렇다면 예수의 그 갈등이 그저 한때 시대적으로 있었던 것이어서 잊어버려도 되는 무엇일까. 그건 그렇지 않다.

 

예수의 이 두 번째 대결은 결국 종교심의 진실성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마주친 현상들은 시류(時流)와 무관하다. 그런 태도들은 인류 자체나 교회의 역사에서 언제나 맞부딪칠 수 있는 것들이다. 어떤 현상들은 거의 천연스러운 경향 같기도 하다. 진정한 의미의 전통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이 변형된다든가 외적인 것이 지나치게 평가된다든가, 인간적인 질서가 신적인 질서를 비껴 고착해 버린다든가, 그릇된 엘리트 의식에 빠진다든가. 이제 내가 예수와 바리사이주의 간의 갈등점을 하나하나 열거하다 보면 그때마다 복음서에서 해당 사례를 꼽을 수 있다.

 

1. 사람들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업적을 내세우는데 비해 예수는 하느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성전에서 바리사이가 바친 기도아닌 기도를 상기하자.

 

2. 사람들은 격식과 외양에 큰 무게를 두기 일쑤다. ‘코르반(Qorban. 성전에 바친 헌금 또는 제헌물로서 다른 용도로 쓰이지 못하는 것)’과 올바른 제물의 예라든가, 치유와 안식일 위반의 어이없는 잦은 대립을 보아도 알 만하다. 이러한 율법주의 과잉과 진정한 종교심의 변조 등은 반복되어 온 것이 아닐까.

무엇이 더 중요한가. 상담했다는 증서 조각이 - 상담이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 삼당을 하러 갔었다는 증서가 - 아니면 임산부가 결국 낙태를 하러 가기 때문에 더 죽고 말 태아 오천 명이 더 중요한가. 교회가 그 임산부들과 더 이상 연락이 닿지 않았단 말인가. 무엇이 더 중요한가. 어떤 수속 절차의 무책임한 확인 증서가 수천 명의 죽음보다 더 중요하단 말인가.

교회에서 얼마나 자주 하찮은 형식에 중죄의 무거운 짐을 지웠던가. 어린 시절 학교 가는 길에 혓바닥으로 눈송이를 받아 핥으면... 또 주일미사를 거르면 매번 대죄가 된다고 수십 년 동안 가르치지 않았던가. 나는 신학생이 돼서 이 점을 알아보았는데 이 세상 어떤 저명한 윤리신학자도 그런 주장을 한 일이 없었다. 무슨 관습이든 그걸 버린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소홀히 하는 것 하나하나는 중요시하지 않았다. 전례 규정은 또 얼마나 만들어 냈던가. 나는 청년 사목을 맡았을 때 돌로미티(이탈리아 서북부의 산맥)에서도 제일 높은 정상에 무거운 돌 제대를 지고 올라간 적이 있는데, 그 산꼭대기에는 돌이 그야말로 지천이었다. 그뿐이랴. 한번은 청년 그룹과 함께 고산 목장에서 미사를 드리려고 하다가 금지당했다. 이유인즉, 그런 고산 목장 미사는 해당 교구청 측에서 매우 정성 들여 드리게 되어 있노라고...

바리사이들은 그 당시 600항의 금지 조목이 있었다. 이른바 메테크울타리를 발달시켰던 것이다. 그 울타리가 얼마나 촘촘하던지 그 안에서 무엇이 보호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3. 인간이 만들어 놓은 법률을 얼마나 강조하던지 하느님의 법은 시야 밖으로 밀려 나갔다. 앞서 말한 코르반을 보더라도 성전에다 제헌물을 바치면 그것이 부모를 부양하지 않는 구실이 되었다.

여러 해 전에 린츠(Linz) 시에서 총대리 두 명이 회동한 자리에서, 점점 심각해지는 사제 부족으로 공동체들이 성사의 은혜를 못 입게 되는 문제의 한 해결책으로 비르 프로바투스(Vir probatus. 라틴어로 검증된 사나이라는 뜻. 모범적 신자로 오래 확인된 남교우에게 수품하자는 말)’가 어떻겠냐고 제안한바, 상부에서의 회신에 그것은 신앙에 위배된다고 하였다. ‘비르 프로바투스제도는 성서에 언명되어 있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해 실행되었으며, 초기 교회에서는 물론 합동 동방교회에서도 오늘날까지 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어째서 교회의 믿음에 어긋난단 말인가. 이것은 바리사이주의다. 신적인 지시가 인간적인 전통에 휩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위한 배려는 분명 맨 위에 있어야 한다.

 

4. 바리사이주의 추종자 일부는 배운 티를 내거나 그릇된 우월감을 드러내고 싶어 하며 서민을 멸시한다. 대중은 숨죽이며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데 이들은 젠장, 이놈의 암메--아레쓰(히브리어, “이 흙바닥 것들의 뜻), 율법은 하나도 모르는 주제에하고 내뱉는다. 그런데 예수는 이 서민들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순박한 사람들의 선의와 신뢰심을 더없이 존중하였다.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순박한 사람들의 지혜에는 귀 기울일 줄 모르는 안다는 이들의 배웠노라는 자만심은 예로부터 있어 왔다. 나는 본당 사목 방문을 하면서 노인과 병자들 약 6000명을 모두 찾아보았다. 그런 방문 때마다 얼마나 감동하면서 물러났는지 모른다.

교회 안에서 이를 테면 외롭게 영성의 히말라야 정상에 올라앉은 그룹들이 가끔씩 있다. 그중에는 자기들만이 구원을 전세 냈는지 장백의(長白衣)를 입은 채 샤워라도 할 듯이 열심한 이들과도 부딪힌 적이 있다. 이런 경우 할 말은 한마디밖에 없다. 하느님 나라에서 자기네가 엘리트라고 느낀다면 그들은 더 이상 엘리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학력과 지혜는 매우 부서지기 쉬운 그릇에 담겨 있다는 것을.

 

바리사이주의 자체와 이와의 대결은 시대를 초월한다. 궁극적으로는 예수를 따르는 데 있어 진실성과 깊이가 문제이다. 예수 자신도 말한 그대로이다. 십일조세를 바치는 일도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가 아니라 정의와 자비와 신의에 대해서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께 눈길을 돌리고 또 돌리고,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의 분별을 위하여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한다. 사랑이 첫째여야 함을 신중히 생각하고 마음 깊이 새기며 구원은 자신의 공로가 아리나 오로지 은총을 통해서만 이루어짐을 깨달아야 하겠다.

 

-라인홀트 슈테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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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2020.04.20 08:29
    사람들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업적을 내세우는데 비해 예수는 하느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우리는 주님께 눈길을 돌리고 또 돌리고,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의 분별을 위하여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한다. 사랑이 첫째여야 함을 신중히 생각하고 마음 깊이 새기며 구원은 자신의 공로가 아리나 오로지 은총을 통해서만 이루어짐을 깨달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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