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시기가 되면 한동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고모는 내게 사순 시기 동안에는 절대 단 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일렀습니다. 하지만 부활절을 맞이하기 위해 초콜릿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체중을 1킬로그램 이상 줄이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순 시기를 이용해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 값싸게 비쳤습니다. 이런 시도는 부활 축제보다는 여름 휴가 때 수영복을 입기 위한 것과 더 연관이 있을 테니까요.
‘40일간 ○○ 없이’, 담배 없이, 알코올 없이, 텔레비전 없이 지내는 운동이 개신교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것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무거운 짐이고, 해내야 하는 ‘의무’처럼 여겨집니다. ‘단식’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를 쓸수록 그것은 더 이롭게 작용합니다. 이것이 부활 축제, 해방의 축제를 준비하는 제세가 아닐까요? 자신에게 무언가 포기할 것을 명하면서, 때로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40일 동안 우리는 생명이 죽음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축제를 준비합니다.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지요!
몇 해 전부터 자주 떠올리게 되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더 많이 시작하도록 이끌어 주는 생각입니다. 내 삶은 어떤 특정한 조직 안에서, 특정한 질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조직과 질서는 유익할 때도 많고, 때로는 살아가는 데 지탱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직이라는 것은 고정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유익하고 든든하게 받쳐주던 것들이 내 삶을 가두는 ‘감옥’으로 급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보다 조직과 질서가 더 중요해지고 그것들은 나를 얽어매는 사실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도전입니다. 사순 시기의 본래 의미는 바로 이 도전입니다. 내가 세워놓은 질서를 조금만 바꾸면, 일이 새롭게 진행되고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새로운 질서가 잡힐 수도 있습니다. 내가 세워놓은 질서를 조금만 바꾸면, 조직은 내게 도움이 됩니다. 조식이 압박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또한 익숙한 것에 더 이상 갇히지 않게 됩니다. 내가 세워놓은 질서를 조금만 바꾸면, 생명과 활기를 새롭게 불러올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포기를 위한 포기, 고통을 위한 고통이 아닙니다. 사순 시기의 관건은 일상에서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을 새롭게 연습하는 것, 생기를 되찾아 더 활기차게 되는 것입니다.
일이 많은 사람에게는 하루에 30분간 산책하는 일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10분간 짬을 내어 글을 읽거나 성당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일주일에 하루는 텔레비전을 켜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권이라도 책을 읽겠다고 결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자신을 괴롭히거나 고행하는 기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시기 동안 단순히 연습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꿈과 갈망을 조금씩 실행에 옮기면서 자신을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해방의 축제, 생명의 축제를 지내는 법을 단순하게 연습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이 시기는 나와 하느님을 갈라놓는 그 무엇을 치우는 기회가 됩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다른 방식으로 실행하는 기회이고, 실제로 무언가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초콜릿과는 아주 다른 요소들이 내 삶에 자리하고 있다는 게 두려웠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생기를 찾지 못했고, 하느님과도 멀어졌습니다.
- 안드레아 슈바르츠